#2. 무기력 그늘 아래에서의 자화상
무기력에 빠진 내 모습은 정말 낯설었다.
나는 태생적으로 부지런한 습관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지만, 약간의 완벽주의에 대한 강박과 수년간 스터디플래너를 적다 보니 생겨버린 계획병 때문에 아무것도 목표하는 바가 없을 때면 엄청나게 불안해하는 성격이었고 그래서 언제나 늘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며 일상을 꽉꽉 채우는 사람이었다. 심지어 쉬는 날이어도 계획에다 “휴식: 무엇을 하고 놀자”라고 그 날짜에 미리 적어두어야 안심이 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주변에서는 종종 내가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처럼 비추어졌는지 그런 종류의 ‘대단하다’는 말을 듣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문득 나 자신이 ‘무기력에 빠진 건가?’라고 의심을 처음 품었던 순간의 내 모습은 그동안 한 번도 본 적 없는 내 모습이었다. 서른이 넘은 적지 않은 나이에 새로운 내 모습을 마주하니 적잖이 당황스러웠고 어떻게 해야 할지가 막막했었다.
우선 주중에는 온통 직장일로 얼룩져 제대로 된 취미생활 조차 영위하지 못한 채로 금요일까지 맞이한다. 억울한 마음에 금요일 밤에는 늦게까지 잠에 들지 않고 무언가를 하기는 하는데, 기운이 없고 피곤하니 따로 생산적인 활동을 하기보다는 아무 생각 없이 엄지손가락만 쓱싹 움직이면 볼 수 있는 SNS, 웹툰, 온라인 쇼핑몰, TV 예능의 하이라이트 모음 등을 열심히 그리고 동시에 대충 (아이러니한 단어 조합이지만 정말이다.) 흘겨본다. 새벽 두시쯤 되면 이제 억울한 마음이 조금 가셔서 잠자리에 눕기는 하지만 불을 꺼놓고 계속해서 이것저것 정보의 바다를 서핑한다. 피곤해서 눈이 뻑뻑하지만 뭔가 정신은 오후에 마신 아메리카노의 카페인 기운이 갑자기 되살아난 듯 각성되어있는 느낌이 든다. 이제는 자야 하는데.. 자야지.. 하는 생각에 빠져있지만 곧 해가 뜰 것이다. 그러다 몇 시에 잠들었는지 모르게 잠에 든다. 눈을 뜨면 토요일 아침. 자, 이제 가열차게 주말을 멋들어지게 보내고 싶지만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점심시간이다. 부스스한 모습으로 방에서 일어난다. 해가 중천에 떴지만 집은 어둑어둑한 상태이고, 나는 세수조차 하지 않은 모습으로 온몸에 뭉쳐있는 근육들이 보내는 통증 신호를 감지하고 몸을 이리 비틀었다 저리 비틀었다 하는 어설픈 스트레칭을 하다가 다시 핸드폰부터 집어 든다. 귀찮은 마음에 핸드폰을 또 열심히 그리고 대충 본다. 약속을 잡기에는 귀찮고 집에서 이대로 보내기에는 억울한 마음이 든다. 그래서 집에서 내가 좋아하는 걸 하면서 놀려고 계획을 짜 본다. 그런데 웬걸, 내가 평소에 좋아하던 그림 그리기, 책 보기, 기타 연습하기 등등.. 모두 너무 귀찮고 재미있을 것 같지가 않다. 재미있는 걸 하고 싶은데, 뭘 떠올려도 재미보다는 피곤함이 먼저 밀려든다. 그냥 쉬어야만 할 것 같다. 그래서 그냥 쉬기로 한다. 할 수 있는 거라곤 여전히 핸드폰을 대충 쓱쓱 보다가 재밌는 짤이 나오면 실실 웃는 정도. 그리고 그보다 더 적극적으로 시간을 투자하자면 tv를 켜고 영화 한 편을 골라 감상하는 것. 일어난 시간이 조금 지나니 곧 배가 고파오지만 먹고 싶은 것도 딱히 없다. 집에서 요리를 해 먹으려면 장을 봐야 하는데 그러기엔 지금 당장 배가 너무 고프다. 우선 쉽고 빠르게 먹을 수 있는 걸로 배달을 시켜먹는다. 밥을 먹고 치우려고 주변을 둘러보니 집이 너무 엉망이다. 어디서부터 정리를 해야 할지 모르겠고, 한번 시작하면 너무 오랜 시간 동안 청소를 할 것 같아서 하루 남은 주말로 미룬다. 그렇게 곧 밤이 되면 자고 일어나면 일요일 하루 남았고, 곧 다시 월요일이 올 거라는 생각에 토요일 밤부터 우울함이 다시 찾아온다. 그리고 놀라우리만큼 주중 회사 업무는 정말로 열정적으로 열심히 한다. 그렇게 정신없이 해야 그나마 이것저것 일을 줄여나갈 수 있으니까.
무기력에 빠진 상태에서 정말 신기했던 점은, 회사 업무는 생각보다 지장이 없다는 점이었다. 소홀히 하는 것은 내 삶이었지, 회사에서의 업무가 아니었다. 회사에서의 업무는 아무 생각 없이 열심히 하게 되는 신기한 마법을 지녔다. 나의 담당업무라는 책임감과 자동으로 부여되는 목표 기한 때문인지 생각보다 집중력을 유지하기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직장에서의 내 모습과 여가시간의 내 모습의 괴리감이 커질수록 무기력의 그늘은 점점 더 크게 번져갔다.
무기력증, 번아웃 증후군 등에 대한 글귀와 영상을 많이 보게 되었는데 자가진단 테스트 질문이 10개 정도 있으면 나는 거의 10개 모두 해당되는 상태였다. 몇 개만 되어도 번아웃 상태라고 진단을 내린다는 점이 무색할 정도로 거의 만점에 가까운 정답률(?)을 보였다. 그나마 내 스스로가 나를 이런 상태라고 판단한 것은 좋은 징조였다. 사실 스스로 진단을 하기 전까지 이러한 상태로 지낸 기간이 거의 반년 이상 되었던 것 같다. 전문가들은 공통적으로 ‘몸을 움직여라’, ‘낮에 햇빛을 보아라’, ‘사람을 만나라’ 등의 조언을 하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정작 무기력에 빠진 사람은 그런 것들을 하기 위해 몸을 일으킬 힘이 없다. 안 한다기보다는 못하는 것에 가깝다. 그래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생각했다.
‘아. 우울도 질병이구나. ’
나약한 인간들이나 겪는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누구나 병에 걸릴 수 있듯이 누구나 우울도 올 수 있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