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주시험 Episode & ABRSM 피아노 실기시험
한 학기에 적어도 네 번의 연주를 해야하는 전공실기 수업.. 연주 전의 스트레스는 극에 달한다. 음악공부는 무언가 다른 공부와는 다르리라고 어렴풋이 생각했지만, 수강하고보니 영어나 수학과 전혀 다를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에피소드 1. 중간고사
지난 중간고사 연습 때엔 기가막힌 일이 있었는데 잠깐 건반 앞에 엎드려있는다는 것이 퍼뜩 정신을 차려보니 흰 건반에 영롱하게 고인 침... 남이 볼까봐 얼른 옷으로 훔치고.. 닦고 닦고... 살다살다 책이 아니라 건반 위에 침을 흘리게 될 줄이야.
여름방학부터 곡을 공부해왔지만 날짜가 다가와서야 맘잡고 밤새워 암기하기 시작한 나 자신에 대한 자책감. 그리고 전날 서너시간 밖에 못 잔 채로 한 시험준비에 단정하고 깔끔한 옷차림과 화장 등 피아노 연주 이외에 신경쓸 일도 많았던 중간고사 당일. 교수님 두 분 앞에서 전날 부랴부랴 외운 곡을 겨우겨우 멜로디 맞춰 치기만 바빴던 내 모습. 멍한 정신으로 곡에 집중은 안되고 내 소리가 들리기보다 연주 시작 동시에 사각사각 연필로 써내려가시는 교수님의 평가내용에 더 신경이 쓰였으니 결과는 뻔하다.
다음부터는 무조건 연습 시작과 동시에 암기, 그리고 연주 전날은 무조건 잠을 푹 자고 최상의 컨디션 유지를 위해 신경쓰기로 다시 한 번 다짐해본다.
에피소드 2. ABRSM 실기시험
10월 중순의 중간고사를 마치자마자 다음주말에 바로 ABRSM 실기시험이 있었다. 이 영국왕립음악원 주관 실기시험은 스케일과 아르페지오, 시창과 청음, 시대별 선곡된 3곡 연주, 초견 의 네 분야로 이루어진다. 올해 하반기 실기시험은 영국에서 오신 피아니스트 출신의 여자선생님이 감독관이셨다.
바람이 많이 불던 일요일 오후, 서울 세관 건너편의 ABRSM 한국센터를 처음 찾아갔다. 간단히 접수확인 후 덜덜 떨며 기다리다가 시험장에 들어갔다. 접수확인 시 연주를 먼저 할 지 스케일을 먼저 할 지 물으시는데 이 때 연주를 먼저 하겠다고 말씀드렸고 그래서 시험은 연주곡 3곡 이후 스케일질문, 이후 시창청음 및 초견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1. 곡 & 스케일 : 레슨 때 교수님이 자신감 (Confidence) 과 지속성(Continuity) 을 말씀하셨는데 아직 감 잡지 못한 채 연습부족이 여실히 드러났다. 악보는 보고 칠 수 있었고 한 곡이 끝날 때마다 "thank you" 라고 말씀해주셔서 마음이 조금씩 편안해지기 시작했지만 이어진 스케일 시험은 연습부족으로 역시 쉽지 않았다. 각 섹션별 1가지씩만 물으시는데 잘 못하면 다른 조로 재질문을 해주셔서 기회를 주셨다.
2. 시창 & 청음 : 이번엔 자리를 바꾸어 내가 피아노 옆에 서고 선생님이 피아노 앞에 앉으셨다. 청음시 노래를 할 지 연주로 할 지 정할 때 노래를 하기로 하였다. 1) 먼저 두 번 연주해주시는 곡의 소프라노 성부 몇 마디를 그대로 노래하면서 시작되는 시험은 급수별로 조금씩 내용이 다르다. 이후는 2) 처음 보는 악보의 소프라노 성부를 반주에 맞추어 노래하게 된다. 3) 곡의 종지 cadence 가 완전인지 불완전인지 맞춘다. 4) 곡의 리듬을 박수로 따라하고 박자 종류를 맞춘다. 5) 한 페이지 쯤 되는 곡의 연주를 들은 이후 작곡시대와 곡의 분위기 및 구성과 특징을 부연한다.
3. 초견 : 초견은 반 페이지 정도의 처음 보는 악보를 연주해야했다. 일단은 멜로디가 끊기지 않고 연주하는 지속성이 중요하지만, 악상과 구성을 제대로 파악하고 잘 연주하면 더 훌륭하다. 30초 정도 챙겨볼 시간을 준다. 시험 준비 때는 초견 악보를 보면, '동일한 리듬이나 동일한 멜로디를 찾아본 후 제목과 악상, 지시표 등으로 분위기와 구성을 파악하고 세부적으로 화성과 임시표 등을 더 신경쓴다' 라는 나름의 방침을 정해두었지만 막상 시험장에 들어서니 주어진 30초 동안 그저 멜로디를 한 번 쳐보기에 급급했다. 그런 과정이 생략되었으니 일단 음은 박자대로 잘 쳤지만 악상이나 구성을 살리는 일은 생각하지 못하고 짧은 곡이 끝나버렸다.
총평 : 처음 시험이었는데, 영국에서 파견된 시험관님과 한국 본사 통역자분이 편안하게 해주셔서 시험 전 막연히 걱정했던 살벌한 느낌은 나만의 연습부족으로 인한 자격지심과 그로 인해 느껴질 창피할 마음이 빚어낸 불안과 열등감이 아니었을까 진단해본다. 좋은 경험이었다.
에피소드 3. 위클리 연주
어제는 학우들 앞에서의 위클리 연주일이었다. 중간고사 때의 경험으로 전날 잠을 잘 자고 아침일찍 일어나 단장하며 마음의 준비를 했다. 옷차림과 외모도 좀 더 신경쓰면 청중들에게 준비된 모습으로 보여질 것 같았다. 늘 그러했으나 어제의 연주 전 스트레스는 거의 극에 달했었다. 자책 불안 열등 창피 와 같은..나 스스로를 괴롭히는, 내가 이것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겪지 않았을 모든 감정들에 나 스스로를 원망하게 되었다. 용기가 많이 필요했다. 수업이지만 다들 생업이 있는 가운데 귀한 시간을 만들어 참여하는 날, 좋은 연주를 들려주고싶다는 사명감도 들었다. 그러나 내 스스로 진단하는 나의 수준은 늘 부족했다.
곡은 ABRSM 시험 때 연주한 세 곡을 하기로 했다. 정통 클래식은 바흐의 인벤션 한 곡 뿐이었지만 낭만시대 느낌의 왈츠소품과 에니메이션 주제곡으로 나왔던 현대곡도 하나 포함되어 다채로운 느낌이 들었다. 보통 이 때는 시험곡 중 하나를 연주하거나 자신이 연주하고싶은 짧은 소품 몇 개를 연주하기도 한다. 중간고사 기말고사는 암보가 원칙이고 위클리도 그러했으나 위클리 때는 악보를 보는 것도 허락되어서 내 악보 그리고 교수님이 보실 악보도 하나 더 준비해갔다. 용기를 잃지 않기 위해 제일 처음 연주하기로 하고 앞으로 나갔다. 세 곡에 대한 설명을 잠시 한 이후 시작했다. 학우들 모두 서로가 어떤 마음으로 이 시간에 이 곳에 모이는지 아는 사람들이기에 서로가 서로를 격려해주는 따뜻한 느낌이어서 그 따뜻한 시선이 마음으로 느껴지던 공간.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집중하여 좋은 연주를 보여주는 것이 나 자신과 교수님, 그리고 학우들에 대한 예의이다.
처음에 집중이 조금 어려웠지만 곧 빠져들었다. 두번째 곡 때는 함께 연습하던 교수님 목소리를 떠올렸다. 세번째 곡을 치는 중반 즈음에 나를 보고있는 시선들에 신경이 쓰여 잠시 집중을 못했지만 곧 돌아와서 잘 마무리하고 들어왔다.
내 곡 이후는 성악하시는 남자분이 나오셨다. 연주 전의 곡설명을 하며 "노래하다 죽을지도 모른다" 라고 말하시는데 그 말에 왜 그리 공감이 되던지. 딱 그런 심정이 연주 전엔 들기 때문에 왜 이런 고생을 하는 것인가 자책이 심해지며 이것이 내가 선택한 길이었나 아닌 것 같은데 라며 끝없는 의구심을 갖게된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갖는 이가 나 뿐이 아니었구나. 라는 안도감을 그 한 마디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운명공동체 라는 같은 심정을 갖고 11월의 스산한 바람이 부는 야심한 밤, 교실의 불을 밝히고 모여 연주를 한다.
연주수업 시작 전, 옆 교실의 그랜드피아노에서 사전 연습을 하는데, 졸업연주를 준비중이던 남학생 한 명이 같은 교실에 있었다. 조금 지능은 일반인같지 않으나 피아노에 소질이 있는 남학생은 다음주 월요일 졸업연주회를 앞두고 있고 슈만의 곡을 연주한다고 하였다. 슈만의 곡은 참 어렵지 않은지 물으니 "괜찮아요. 연습을 많이 했거든요"
너무나 간단하고 단순 명확한 그 대답에 내 오랜 고민에 대한 해답이 있었다. 정말 정직하기도 하지. 가식없는 솔직함에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또 배웠다.
모든 연주가 끝나고 교수님의 총평이 있었다. 오늘은 성악 2명, 피아노 4명이 연주하였고 오늘 오신 교수님은 피아노 전공 선생님이셨다. 성악을 전공하지는 않으셨으나 모든 곡을 들을 때 톤과 셈여림과 리듬 을 살리는지 듣는다고 말씀하셨다. 피아노 화음 연주시 방법 그리고 콘서트홀에 많은 스테인웨이 피아노의, 저음부가 풍성한 대신 중고음부의 소리가 약한 특징에 대비하기를 당부하셨다. 손가락이 무척 긴 한 친구가 그랜드 피아노에서 연주시 3번 중지가 건반뚜껑에 닿는 어려움을 어떻게 해결하는지 여쭈었고 그럴 때의 연습방법에 대한 조언도 해주셨다.
모든 수업을 마치고 우리는 연주에 대해 이야기나누었다. 이름이 어려웠던 작곡가의 이름을 되새겨 불러보기도 하고 서로의 곡에 대해 묻기도 했다. 서로가 어땠는지 이야기해주기도 하고 좋은 곡을 많이 알게되어 고마워했다. 서로를 격려하고 같은 심정을 나누었다. 간절하고 아름다운 곡을 부르던 학우가 실수에 웃음을 터뜨려 분위기를 반전시키던 모습, 그 자세에 일침을 주는 학우도 있었다. 그렇게 서로 격려하기도 하고 비판하기도 하고 함께 용기를 주는 말로 즐거운 연주회를 마무리했다.
오늘 내 연주는 동안의 아픈 경험치가 쌓여서, 그리고 학우들의 따뜻한 시선 덕분에 조금은 만족감을 느낄 수 있었고 곧 다음 연주 때도 이러할 수 있도록 연습을 더 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함께하는 학우들이 정말 소중하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하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공부중인 다른 수업의 밀린 레포트도 10월 세째주까지 준비해야했는데다 9월 휴가와 10월 초 연휴에 이어진 긴 제주여행의 여파로 일상으로의 복귀에 어려움도 있었다. 아이학교 운동회 참여 및 반 점심식사 준비, 중간고사 곡을 연습하며 가을 초입 불을 뗀 방에 에어컨을 틀고 연습하다 잠들며 얻은 기침감기, 치과치료와 수면 내시경을 포함한 건강검진. 그리고 새롭게 시직한 클라라샘과의 레슨수업.
이 모든 상황들을 어제로 끝마치고 이제야 한숨 돌려본다. 푹 쉬고싶은 마음이 더할 줄 알았는데 다시 다음곡을 연습하고싶은 의욕이 불타오른다.
"이제는 피아노 연습만이 살 길이라우."
카톡으로 보내주신 클라라 선생님 말씀이 처음엔 이해가 안 갔지만 딱 내게 들어맞는 말씀이다. 실지로 이 일이 신체적으로 살고 죽는 문제는 아니다. 그런데 연주를 앞두고는 늘 그런 단어가 떠오른다. 그러니 그냥 선생님 말씀을 따라야겠다. 그래야겠다.
내 나이 마흔, 20년 또 후딱 갈지도 모른다. 이 어려운 경험들, 늘상 죽을 둥 살 둥 하는 경험들을 만나고 겪고 지나고 나면 그 때의 나는 조금은 더 내 마음에 들지 않을까.
희 로 애 락. 즐길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귀한 선생님과 학우들과 함께 음악의 길을 계속 걸으며 음악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