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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필가 박신영 Dec 22. 2017

우리가 예술을 하는 이유 : 죽어있는 오감을 살리는 일

무색성향미촉법, 무안이비설신의...가 아니다.

   요즈음 3년만에 와인수업을 다시 듣고 있다. 2014년 초 WSET (wine & spirit education trust) level 2를 들을 때만 해도 강의가 거의 끝나갈 때까지도 "사람들이 왜 술을 먹는지 모르겠어요" 라는 말을 토해내 모두를 경악하게 했던 나는 이제 와인을 통해 깨어나는 후각과 미각에 감사의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올해 말까지 쓰지 않으면 안되는 비용이 있어 갑자기 시작하게 된 Level 3 과정, 오랜만에 만나는 와인이 낯설고 테이스팅은 살짝 버거운 느낌이다. 그러나 한 시간 한 시간이 지날수록 차츰 그 미묘하고 섬세한 맛과 향의 차이를 찾아내고 느낄 수 있음이 큰 기쁨으로 다가온다.

   테이스팅 잔에 여러 와인을 조금씩 담아둔 채로 수업을 듣다 보면 각각의 와인에서 흘러나오는 향이 공기 중에 떠돌아 합쳐지며 내 주위를 부드럽게 감싼다. 레몬, 황금, 자주, 루비의 맑고 투영한, 각각 와인 고유의 다양하고 깊은 색상이 내 눈을 즐겁게 하고, 시음할 때 느껴지는 맛과 향을 통해 와인들이 지닌 각자의 분위기를 알게된다. 그것은 가볍고 즐거울 수도, 무겁고 섬세할 수도 있다. 내 눈과 귀는 선생님의 강의에 집중하고 있지만 강의 내내 와인들이 수줍게 내뿜는 아로마에 취하는 나는 모 선전에서 보이듯 와인의 공기방울에 감싸여 둥둥 떠다니는 느낌이 즐겁다.


  Level 3 과정은 블라인드 테이스팅이 중요하다.  단계에 따라 외관, 후각, 미각, 품질의 특징에 대해 표현할 수 있어야 하기에 수업 시간에 와인시음연습이 필수이다. 섬세하게 맛과 향을 찾아내 표현할 수 있어야하는 시험이다. 뿐만 아니라 세계와인생산지의 기후와 양조방법 까지 정통해야한다. 과연 통과할 수 있을지 걱정스럽다.

  그러나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으니, 이 과정은 2월 말의 테스트가 끝이다. 이런 시간은 아마 다시 내게 오지 못할 시간이라 생각하고 바짝 공부하여 합격의 의지를 다져본다.




  천성적으로 술이 몸에서 안 받는 체질이라 와인은 배워보지만 사람들이 왜 술을 마시는지  궁금했다. 맥주 한 두 잔 겨우 먹는 나에게 술은 그저 괴로운 것이었다.


     나      : "사람들이 왜 술을 마시는지 모르겠어요"

  선생님 : " 술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 시작되어 늘 함께 있던 것이랍니다."


   3년 전 4개월의 강의가 끝나갈 때 즈음 되어서야 술을 좋아하는 함께하는 동기들과 이야기하고 좋은 시간을 가지면서 어렴풋이 왜 와인을 마시는지 알 듯 말 듯 했다.


  이번 수업에서는 더 값진 깨달음을 얻었다.

  사실 앞서의 수업만으로도 와인라벨을 읽거나 포도품종을 알고 시음하는 과정은 배웠기에 어디 가서 와인을 보고 스스로의 무지를 탓하지 않게될  수준은 되었다. 이번에 상위 단계의 수업을 신청하며 문득 와인을 왜 배우는지 물으시던 선생님의 질문을 곰곰히 생각해보다가 내가 왜 이렇게 음악에 목숨을 거는지, 또 그닥 내 삶에 실용적인 이득이 되지 않는 와인을 배우고 있는지, 왜 피곤한 몸을 이끌고 일부러 시간을 내어 공연을 감상하러 다니는지 퍼뜩 알게 되었다.


     피아노공부를 시작한다고 할 때 담당 레슨교수님은 첫날, 이 공부의 목적을 물어보셨다. 그저 "아무 목적도 없고 실용의 의미는 더더욱 없습니다. 저 자신에게 음악이 필요한 것 같아서 좀 더 배워보고 싶었습니다. " 라고 답할 뿐이었다. 20년 전 직장생활을 시작하며 첫 상여금으로 할부로 피아노를 샀을 때부터 늘 삶이 어렵고 힘들 때 기대고 찾던 것이 음악이었음을 인식하게 된 순간, 더 배우고 싶다는 마음을 품게 된 것이었다.

   

    "왜 와인을 더 배우려 하는거죠?"

   

   어젯밤,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알게 되었다. 어찌보면 그저 방황처럼 보이는, 이 비실용적이고  의미도 없고 목적도 없이 하는 여러 일들에 대한 원인을 기어코 깨닫게 된 것 같았다.



      대학을 동국대로 가기 전부터 우리집은 불교 집안으로 조계사 학생회도 가입하여 활동하기도 하고 어릴 때도 명심보감이나 채근담 중용 같은 책의 귀한 문구들을 종종 읽어왔다.

     대학에서는 <불교의 이해> 과목이 필수여서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은 지금도 다시 외울 수 있을 정도이다.  


  어젯 밤 강의를 듣다 문득,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의 한 구절이 마음에 떠올랐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시제법공상,  

   사리자,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무색성향미촉법, 무안이비설신의..."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사리자여!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으며, 색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색이니, 감각, 생각, 행동, 의식도 그러하니라.

舍利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사리자여! 모든 존재는 텅 빈 것이므로, 생겨나지도 없어지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지도 줄지도 않느니라.

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
그러므로 공의 관점에서는 실체가 없고 감각, 생각, 행동, 의식도 없으며,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눈도, 귀도, 코도, 혀도, 몸도, 의식도 없고,
색깔도, 소리도, 향기도, 맛도, 감촉도, 법도 없으며,
눈의 경계도 의식의 경계까지도 없고,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
무명도 무명이 다함까지도 없으며, 늙고 죽음도 늙고 죽음이 다함까지도 없고,

無苦集滅道 無智亦無得
무고집멸도 무지역무득
고 집 멸 도도 없으며, 지혜도 얻음도 없느니라.

以無所得故 菩提薩埵 依般若波羅蜜多故
이무소득고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고
얻을 것이 없는 까닭에 보리살타는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므로

心無罣礙 無罣礙故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어서, 뒤바뀐 헛된 생각을 멀리 떠나 완전한 열반에 들어가며,

三世諸佛 依般若波羅蜜多故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삼세제불 의반야바라밀다고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삼세의 모든 부처님들도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므로 최상의 깨달음을 얻느니라.

      인간에게는 오감이 있다. 생생히 살아있는 오감이. 그러나 일상의 중생들이 이 오감을 생생히 느끼며 생업에 종사하며 살기에는 너무나 버거운 현실이 있다. 시간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여유가 없다. 차라리 무시하고 사는 편이 더 나을런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불가의 도를 깨닫지도 못했으나, 그와는 다른 의미로 그리고 너무나 자연스럽게 무안이비설신의와 무색성향미촉법을 따르게 되는 것이다. 현대 직장인의 삶에서는 당연하고 자연스럽고 유용하기까지 한 이것..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색깔도, 소리도, 향기도, 맛도, 감촉도, 법도 없으며, 눈도, 귀도, 코도, 혀도, 몸도, 의식도 없고,

     다시 읽어보아도 우리네 흔한 중생들이 살고있는 삶 중의 일, 특히 직장인들의 일상 생활을 잘 그려내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게 되는 부분이다.  오해하지 않으신다면 좋겠는데, 불교경전을 그로테스크하게 꼬아서 해석하려는 의도는 절대 없다. 단지 내 생활과 불교 경전 한 부분이 닮아있지 않았나 하는 이상한 발견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 뿐이다.


    집안내력과 학교에서의 경험으로 어릴 적부터 듣고 접해와 직접 생각하여 만든 사유의 과정이 생략된 채 암송하던 마하반야바하밀다심경의 한 구절 그리고 논어 속 중용이라는 훌륭한 생각을 잘못 해석한 폐단이 되겠으나, 그냥 일에 찌들고 지친 직장인이 문득 발견한 우연한 생각이니 한 번 웃어 넘기자는 말이다.


   그리하여  대개는 평상시 이러한 심정-무색성향미촉법, 무안이비설신의-으로 하루하루 먹을거리 입을거리 쉴 거리를 위해 내내 달리고 달리며 시간을 보내는 삶 중에 있기에, 잠시의 시간이 나면 피아노를 배우고, 공연장에 가고, 와인의 향취에 젖어보며 오감을 깨워본다.


    말하자면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 "건강하게 살아내기 위해서" 라고 필사적으로 매달리고 있다고 말할 수 있으려나.

  


    모든 예술활동은 오감을 깨우는 일이다. 글쓰기와 읽기는 의식을 깨우고, 음악은 귀를, 미술은 눈을, 와인은 미각과 후각을 깨우게 한다. 훌륭한 공연을 보며 눈과 귀가 호강하면, 마음은 그 감동의 여운으로 가득채워져 죽어있던 오감과 의식을 생생하고 선명히 느끼게 한다.


     강신주 씨의 감정수업 이라는 책을 재미있게 읽었으나 마지막에 조금 답답했던 순간이 있었다. 모두가 그렇게 감정을 제대로 느끼고 표현하고 행동하고 살 수 없고 그러지도 못하는 것인데,  어떻게 하라는 말일까. 잘못하여 선을 넘어가면 돌이키기 어려운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는, 내 감정을 컨트롤하는 일.  


     어찌되었던 내 감정의 표현과 발산을 아무 제약없이 자유롭게 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니 다른 방법을 통해, 예술활동을 통해 죽어있듯 잔잔하던 오감을 깨워 나 스스로 내가 살아있음을 느껴보는 것, 나의 숨기고 억눌러져있던 감정을 어린아이 달래듯 달래어주는 건 어떨까.  

     음악감상, 미술관람, 공연관람이나, 글쓰기, 책읽기, 악기 연주하기, 그림 그리기, 와인 배우기 등 오감을 깨우는 예술활동과 레포츠 활동을 통해 숨죽여 살게 하는 현대사회의  스트레스를 건전히 해소하고, 건강한 사람으로 거듭 태어나 살아가는 일, 지금의 우리의 삶에 가장 필요한 일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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