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롭고 홀로 있을수록 함께 있다, 순수하고 자유롭게
집에 오니 지난 5월, 코엑스에서 열린 도서전에서 주문했던 창작과 비평 가을호가 도착해 있다. 와인빛 가을색이 좋다. 회사 독서연수로 신청했던 9월의 책 강원국의 글쓰기도 와서 반가웠다. 얼른 연필을 들어 표지 안쪽에 오늘 날짜를 적어둔다.
새로 온 책을 훑어본 후 머리를 묶으려 거울을 뒤돌아보다 노란 표지의 <천국의 열쇠>가 꽂힌 책장을 보았다. 그 후로 사방 벽을 채운 서가를 훑으며 오늘의 책을 모아보니.
서가에 빼곡히 꽂힌 책들은 그 두 배의 책 중에서 절반을 버리고 남겨둔, 한 권 한 권 모두 엄청난 책들이다. 책장에 꽂힌 책들을 찬찬히 볼 때에 그 내용이 마음에 떠오르며 그 깊이에, 글임에도 불구하고 너울거리며 떠오르는 이미지들에, 픽션이든 넌픽션이든 작가의 경험과 고뇌, 그 무게에, 기쁘고 슬픔을 주던 내용 중에서 느꼈던 내 감정들에. 그 모든 것들이 차례차례 마음에 떠오르며 가슴벅차오름에 뜨거운 눈물이 한 줄기 볼을 타고 내려온다.
<천국의 열쇠> 를 중심으로 몇 권을 모아보니 홀로, 외로이 자신의 길을 걸어왔던 분들의 책이 모아진다.
천국의 열쇠 는 A.J.크로닌 님의 책으로, 예전에 클래식FM에서 우연히 소개받은 후 사 읽었던 책이다. 표지 안쪽을 보면 {2013년 11월 13일 yes24에서 구매. 12월 1일 시작, 12월 5일 끝. 정말 감명받은 책 ,깊이 감사드린다} 라고 씌어있다.
제5부 귀향 편을 다시 읽어본다. "오, 주여, 제 평생에 단 한 번의 소원이옵니다. 당신의 뜻이 아니라 저의 뜻을 제발 이루게 해 주옵소서."
주인공 치섬 신부의 회고록의 끝 부분에 가서, 가엾은 아이 안드레아 를 키우기 위하여 노신부는 평생 처음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빈다. 아이와 함께 고향에서 지낼 수 있도록 고향의 교구를 맡게되는 것. 치섬신부를 평가하러 온 신부가 꾼 꿈 또한 아름답다. 아기 천사의 모습을 한 치섬신부. 그리고 자신을 나타내고있는 불만스러운 늙은 천사의 대화 말이다. 마음 깊은 곳, 영혼에서는 옳고 그름을 분명히 알고있는 그런 계시를 받고 그는 자신이 쓴 보고서를 찢어버린다.
이제는 돌아가신 법정 스님의 <홀로 사는 즐거움>. 2015년 4월에 다시 사 두었다.
"혼자 살아온 사람은 평소에도 그렇지만 남은 세월을 다할 때까지 자기 관리에 철저해야 한다. 꽃처럼 새롭게 피어나는 것은 젊음만이 아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한결같이 삶을 가꾸고 관리한다면 날마다 새롭게 피어날 수 있다. 자기 관리를 위해 내 삶이 새로워져야겠다는 생각을 요즘 자주 하게 된다. 나의 말과 글도 마찬가지이다."
법정 스님의 글은 산속 오두막에서 청빈한 삶을 살며 그 삶을 그대로 책에 담았기에 이리 오래 마음에 담기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다음, <온 더 무브>, 신경학자이자 의사인 올리버 색스의 회고록이다. 평생을 열정적이고 행동하며 살았던 사람, 신문광고에서 보자마자 책을 구했던 것 같다. 2017년 11월 20일 교보 인터넷. 이 회고록을 사둔 이유는 그의 다른 책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때문이었는데, 읽을 당시에 내 인생의 책으로 삼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2015년, 82세로 타계하셨는데 회고록은 너무나 솔직하고 열정적이며 생생하게 그려져 있었다. 이 글을 쓰며 작가님께 사과의 말씀을 올리고 싶은데, 그 분이 누린 어린시절이 참으로 부러웠던 마음에 그 때까지 읽었던 내용 중 그가 참으로 수치를 느낄 수 있었을 부분에 대해서만 지인들에게 나쁘게 이야기했던 것이다. 시기와 질투심으로 그 다음에 나오는 그의 가족사의 이야기까지 가기도 전에 그 좋은 분을 흉보고, 내 인생의 책 이라고까지 생각했던 책의 저자를 폄훼하여 내 스스로의 자존심마저 내버린 일을 반성하고 싶다. 고인께 정말 사과드리며 훌륭한 글을 써 주셔서 감사드리고 싶다.
<프란치스코와 프란치스코> 그리고 <침묵> 이 남았다. 2013년 새 교황님께서 탄생했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느끼기에 전세계가 축제분위기였던 기억이 난다. 또 왠지 모르게 한동안 그 분의 이야기가 동화책으로도 어른들 책으로도 여러 권 나와서 2014년 종로 영풍문고에서 이 책을 구입했었다. 지금 읽어도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는 이야기는 신기하고 흥미진진하다. 추기경들의 공통된 뜻이 모아질 때까지 새 교황을 뽑는 투표가 계속되며, 일주일은 걸릴 것이라던 선출시간은 둘째 날 저녁 무렵에 시스티나 성당 굴뚝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흰 연기로 마무리되었다. 성 베드로 광장에 모여 있다가 그것을 지켜보던 15만 명의 군중들이 동시에 환호성과 감사의 기도를 올리고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다. 다섯 번째 투표에서 드디어 3분의 2 이상의 표를 얻은 후보가 나타났던 것이다.
"뉴스에는 주가지수가 2포인트 떨어졌다는 소식은 나오지만, 늙고 가난한 사람이 노숙을 하다가 죽었다는 소식은 나오지 않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살인하지 말라' 라는 십계명이 인간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분명한 명령이었던 것처럼, 오늘날 배제와 불평등의 경제도 우리는 분명히 거부해야 합니다. 이런 경제는 사람을 죽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사람들이 굶어죽어가고 있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음식이 버려지는 상황을 계속 지켜만 보고 있을 수 있습니까? 이것은 배제의 사회이며 불평등의 사회입니다. 오늘날 경쟁과 적자생존의 법칙에 의해 모든 것이 지배되고 있습니다. 힘 있는 사람이 힘없는 사람을 착취하면서 많은 사람들에 배제되고 비참한 상태로 떨어지고 있습니다.
돈은 봉사의 수단이지, 지배자가 되어서는 결코 안 됩니다"
저녁 약속길, 신호등 앞에서 내게 길을 묻던, 황량한 눈빛과 빈 얼굴에 남루하고 더러운 옷을 입은 노숙자같던 분이 떠오른다. "그런 사람이 말을 거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그렇게 이쁘게도 답을 해주다니 .." 함께 있던 언니가 한참 있다 털어놓는다. 그의 행색이 꺼려질만했기 때문에 말을 주고받는 자체가 이상해보일 수도 있을만 했다. 역시 아무 생각이 없다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은 일이다. 그리고 다시 그 선하고 빈 얼굴을 떠올려본다. 그는 어떻게 그 행색과 표정을 갖게 된 것일런지...
은평구에 있는 은평 천사원에는 19세 이하의 남녀아이들 700여명이 산다. 19세가 되면 그 곳을 떠나 자립해야하는 아이들, 아주 잠깐동안 피아노를 가르쳤었는데, 가끔 그 네 아이들이 떠오른다. 오래하지 못한 미안한 마음과 함께 여유가 생기면 숨통이 트이면 아이들의 자립통장에 매월 얼마씩 넣어주겠다고 다짐해본다.
다음으로 <침묵> , 2014년 <사해 부근에서>와 함께 읽었던 엔도 슈사쿠 님의 책이다.
"확실히 그리스도는 그들을 위해 배교했을 거야!
그리스도는 사람들을 위해 분명히 배교했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배교했을 것이네. 사랑 때문에,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해서라도."
"신부는 발을 들었다. 발이 저린 듯한 무거운 통증을 느꼈다. 그것은 단순히 형식만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자신의 전 생애를 통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해온 것, 가장 맑고 깨끗하다고 믿었던 것, 인간의 이상과 꿈이 담긴 것을 밟는 것이었다. 이 발의 아픔, 그때, 밟아도 좋다고, 동판에 새겨진 그분은 신부에게 말했다.
밟아도 좋다, 네 발의 아픔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너희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신부가 성화에 발을 올려놓았을 때 아침이 왔다. 멀리서 닭이 울었다."
엊그제 새벽, 롤랑 조페 감독의 영화 the mission을 보았다. 넷플릭스 회원제로 찾아보니 톰 크루즈 주연 미션 임파서블만 주구장창 나오기에 케이블티비에서 영구소장편으로 결재했다. 제레미 아이언스, 로버트 드니로, 리암 니슨의 젊은 시절을 볼 수 있으며 엔니오 모리꼬네 음악은 환상적이다. OST 중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과라니 족의 노래와 11번 트랙의 the mission 중 1분 15초~45초 부근의 음이다.
답이 없는 세상이지만, 홀로이며 함께하는 이들이 계시기에, 이 슬픔을 딛고 다시 시작할 희망을 가져본다. 그리고 그 분들을 축복하며 침묵으로 기도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