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순간에 피아니스트의 면모를 보여준 어르신
올해 팔순이신 어르신은 아드님의 권유로 처음 피아노를 배우러 오셨다. 돌아가신 아버님을 그리워하며 내내 집에서 울고 계신 모습이 아드님은 늘 안타까우셨다고 한다. 마침 교회부설 문화센터가 첫 시작을 했고, 한사코 싫다는 어머님께 간곡히 부탁하여 그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오게 하셨다.
처음 뵌 날 어르신은 힘들어보였다. 미소 없이 횅한 눈빛과 다크써클.. 조금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수업에 들어가니 생각보다 악보를 잘 보시고 음계연습도 잘 하셨다. 아이처럼 신기해하며 소리가 날 때마다 연신 웃으시는 모습에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손가락으로 건반을 누르면 음이 퍼져나간다.
음의 높낮이가 다르고 그 깊이와 내 마음에 전해지는 느낌도 다르다. 어머니의 오랜 삶의 연륜으로 만들어진 마음은 그 한 음 한 음의 소리를 감탄하며 음미하였다. 아이 때 시작하고 배웠다면 몰랐을 그런 느낌. 삶의 여러 무게를 감당해 낸 후, 세상의 온갖 소리를 다 접한 이후 듣는, 청아한 음 하나하나는 분명 다른 느낌이실 듯 했다.
어르신은 많은 말씀을 하셨다. 피아노가 없지만 하나 두고 싶은데 아파트라 괜찮을지 모르겠다고. 돌아가신 아버님이 음악을 참 좋아하셨다고.
짧은 레슨 시간이 지나갔다. 행복하게 연습하고 가셔서 나도 무척 기뻤다. 다음시간에도 가뜩 부푼 마음으로 오신 어머님. 그러나 짧은 시간 동안의 레슨에 기대만큼 충분히 부응해드리지 못하였고 우려했던대로 그 다음 시간에 어머님께선 오지 않았다. 그 이후로 한동안 얼굴을 뵙지 못했다.
계속 뵙지 못하였지만 내 마음 속에 오래오래 첫 레슨의 기억이 있었다. 침울하던 모습과 피아노소리를 들으며 아이처럼 기뻐하던 모습. 피아노를 구했으면 하시던 얼굴이 떠올랐다. 마침 피아노를 무료 기증한다는 글을 읽고 연락드리니, 고맙지만 마음에 안 드니 그냥 두라고 하신다. 그리고는 미안하셨던지 어느날 레슨시간에 오셔서는 커피 한 잔 사먹으라고 오천원을 손에 쥐어주고 가신다.
여름학기의 시작. 등록했다며 기다리고 계시는 어머님을 뵈니 참 반가웠다. 피아노 소리를 들으며 아이처럼 좋아하시던 모습도 그대로였다. 이제 와 말하는데 하시며, 그동안 손가락 관절치료로 병원에 다녔다고 하신다. 첫 레슨 때 피아노 치는 것이 즐거워서 집에서도 책상 앞에 앉아 피아노 연습하듯 손가락을 짚어보셨다고 한다. 그런데 너무 힘을 주어 짚다보니 열 손가락이 다 아퍼 치료를 다닐 수 밖에 없었다고 하신다.
아차..싶은 마음이 들었다. 유난히 손가락힘이 좋던 어르신. 소리나지 않는 책상에 연습하다 손가락관절에 무리한 힘을 주셨던 것이다. 그렇게 어렵게 연습해왔는데 기다리던 레슨 시간엔 선생이 전처럼 길고 차분하게 가르쳐주지 않으니 실망감이 크셨던 것이다.
피아노를 배우는 학생의 입장에서, 또 지금처럼 가르치는 경험을 하며 깨닫게 된 점이 있다.
피아노레슨은 일대일로 이루어지는 편이고 각 개인마다 그 수준과 처한 개인적 상황이 천차만별이다. 그렇기 때문에 피아노 실력의 향상을 돕기 위해서는 수강생이 지금 처한 개인적인 부분까지 함께 고려해 그에 맞는 적절한 조언이 필요하기도 하다.
피아노레슨은 단지 내가 갖고있는 피아노 치는 방법을 알려주는 게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며, 가게에서 물건 살 때처럼 필요한 물건을 사고 파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음악을 좋아하고 알고자하는 두 사람 사이에 인간적인 접촉이 일어나는 일이고 그런 마음을 서로가 나누고 교감하며 발전시켜가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음악에 헌신하고자 하는 마음이 꾸준할 수 있도록 돕고자 한다면, 지금 그것을 방해하는 것은 어떠한 것인지도 같이 이야기나눌 수 있어야한다. 내가 잘 모르는 상황에 대한 이야기일지라도 적어도 들어줄 수는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다소 섭섭할지라도 서로에게 다음 레슨이 있다는 사실도 받아들여야 한다.
어머님은 다시 피아노로 돌아오셨다. 아드님이 작은 피아노를 한 대 구해주셨다고 한다. 3월부터 시작하셨지만 이제 두번째 레슨시간. 손가락이 아프셨다는 할머님 말씀에 다시 한 번 자세를 점검해본다. 피아노를 치실 때 한 음 한 음 마다 손가락은 물론 팔목과 팔꿈치를 비롯한 팔 전체와 고개까지 계속 까딱까딱하신다. 피아노를 맨 처음 배우는 어린아이들의 모습 그대로이다. 소리는 매우 크나 고운 소리는 아니다.
할머님의 팔꿈치를 가만히 잡아드리고, 계속 끄덕거리시는 턱을 잠시 만지고 있었다. 허리는 굽어있으신 줄 알았는데 등을 조금 누르니 활짝 펴고 앉으셔서 다소 놀랐다.
흔들림 없이 한 번 쳐보시길 바랬다. 소리의 세기는 확 줄었지만 대신 매우 부드러워졌다. 하루아침에 유치원생에서 피아니스트가 되셨다.
이 순간 내가 본 사람은 놀랍게도 바흐연주의 대가 타티아나 니콜라예바 였다.
이 분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얼마나 잘 들었는지.. 그렇게 이상하던 할머님의 모습은 잠깐 사이 이 위대한 피아니스트의 면모로 바뀌었다.
아이처럼 웃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건반을 치던 모습은 스스로 즐거우셨지만 아드님께는 이상하다는 말씀을 자꾸 들으셨다고, 앞으로는 내 혼자 즐거움보다 자세에 신경 많이 써야하겠지만 손가락이 덜 아프겠다고 하신다.
할머님이 바뀐 자세로 C 메이저 스케일을 연주하는 모습은 참 감탄할만하다. 순식간에 오랜 세월 피아노와 함께한 연륜있는 피아니스트의 모습이 되셨다.
그리고 다음 레슨. 다음 레슨이 지났다. 비가 오는 날에도 빠지지 않고 꼭 오신다. 이제는 조금 섭섭하더라도 내게 다른 수강생이 있다는 것도 이해해주신다.
오래오래 음악을 함께하고 삶을 나누는 귀한 인연이길 바래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