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분열적 30대 여성의 삶과 꿈
피아노 공부를 하며 문화센터의 피아노 강사로 성인들을 가르친 지 반년이 되었다. 음악을 배우고 싶어하셨던 남성분들은 상당히 열심히 지속적으로 빠짐없이 다니신다. 그래서 나 또한 더욱 준비하게 된다. 그에 비하여 여성분들은 많이 힘들다. 지속적으로 다니는 분이 많지 않다. 학기로 3개월 등록을 하여도 1개월을 온전히 다니지 못하고 그친다. 나 또한 늘 기로에 있는 음악공부. 하여 내 마음 또한 다잡는 글을 한 편 써보고자 한다.
일찍이 김진애 씨가 '자아분열적 30대 여자들의 건승을 위하여' 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이 글은 <인생은 의외로 멋지다> 라는 책에 실렸고 검색하면 인터넷블로그에서도 찾아 읽기 쉽다. 나에게는 다른 무엇보다 이 '자아분열적'이라는 단어가 깊이 와닿았다. 나 역시 30대를 비슷한 심정으로 지나왔기 때문이다.
30대 여성의 삶.. 피아노 수강신청을 하고 지속하지 못했던 네 분의 엄마는 모두 30대였다. 수업이 있는 토요일 오전, 30대 엄마들의 삶은 정말 바쁘다. 직장에 출근하거나, 아이 유치원행사에 참여하거나, 아이와 병원에 가야했고, 초등학교 입학사전모임에 가야하며 가족행사가 있었다. 한 분은 교회성가대의 일원으로 일요일엔 성가대 활동을 하며 음악이 좋아져 피아노를 배우고 싶어하셨지만 첫 마음과 달리 음악에 할애할 시간을 내기 어려웠다. 30대 엄마의 시간은 다 타인이나 가족에게 내주어야하는 시간인 것이다.
30대 엄마들은 아이들이 크며 의례히 배우게되는 것들을 가르치기 위해, 아이를 학원에 보내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된다. 피아노든 바이올린이든 풀룻이든. 스케이트든 수영이든. 음악,체육,미술 어떤 것이든 아이가 학원을 다니며 배우는 것을 함께 본다. 그 때 자신의 어릴 적 기억도 떠올린다. 지나고보니 좀 더 알았더라면, 좀 더 배웠으면 했던 것들. 그 때 못했던 것들을 나도 내 아이처럼 배워보고싶어 지금 한 번 시도해볼까 어려운 걸음 떼어본다. 그러나, 비로소 내가 원하던 것을 알게 된 지금 오늘의 내 시간은, 나를 의지하고 있는 가족과 월급을 주는 회사의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이 조금만 더 크면..' '내 손이 조금 덜 가도 되면..','직장을 그만두면..' 그 때 해야지 라며 자꾸 미루고 미루게 된다.
비단 내 시간이 나만의 시간이 아닌 것은 30대 여성 뿐만은 아니었다. 50대, 60대, 오랫동안 피아노를 배우고 싶어하셨던 여성들. 그분들의 시간 역시도 가족을 위한 시간이었다. 가족의 식사를 책임져야했고, 손주 손녀들을 보아야했다. 온전히 집중하기 어려웠다.
"이래서 공부도 다 때가 있다고 하나봐요. 학생들이라면 공부만 하면 되니 빠지지 않고 다닐텐데. 늘 이런 저런 일들이 있으니 영 시간이 나질 않아요. 배우고는 싶은데... 연주해보고싶은 곡도 있는데..."
일을 하며 아이를 키우며 공부를 하는 나의 경우도 지속하기 쉽지 않은 일이다. 일상을 바쁘게 지내다가 음악을 생각할 때면, 피아노는 어느 나라의 일이었을까, 전생의 기억은 아니었을까, 마지막 피아노 앞에 앉은 적은 언제였을까 라며 불과 이삼일 전의 연습에도 불구하고 어리둥절해하는 자신을 발견할 때가 있다. 그래서 일주일에 하루 이틀은 꼭 음악을 접하게 하는 문화센터의 수업이라는 강제 덕분에 음악의 끈을 놓지 않을 수 있음이 감사할 뿐이다.
생각해보면 어릴 적 잠시 배웠던 피아노를 다시 가까이 하게된 건 20대 후반, 직장에서 처음 맡는 일과 바뀐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나름의 해결책을 찾던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낯선 동료들, 새로운 일.. 이해타산이 얽혀있는 직장생활..점심식사 후 짧은 휴식시간, 회사 강당의 그랜드피아노를 연주하며 듣게되는 피아노소리는 잠시나마 영혼에 휴식을 주었다. 회사 건물 아래로 보이는 명동 한복판의 피아노학원은 바라만 보고 있어도 내 편안한 안식처로 여겨졌다. 드문드문 잊은 적도 있었지만 생각해보면 가장 힘들 때는 늘 회사 근처의 피아노학원을 찾게되었고 그러다보니 뒤늦은 피아노공부도 결심하게 되었다.
영화를 만드는 친구가 있어서 가끔 좋은 영화나 책을 추천받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책만 사두고는 아직 엄두를 못 내고 있고, 영화의 고전이라는 <시민 캐인>은 흑백옛날영화이긴 하지만 지루함을 전혀 느낄 수 없는 생생한 이야기로, 집에서 시청했어도 온전히 두 시간 집중해서 보았다. 그리고 영화의 끝에서, 한 때 캔커피 브랜드네임이던 '로즈버드'는 이 캐인이 죽어가면서 그토록 애타게 되뇌이던 단어였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한 세대를 풍미하던 언론왕 캐인이 외롭게 홀로 죽어가면서 떠올린 것은 다름 아닌 어머니 곁을 떠나오던 열두살의 어느 날, 신나게 눈썰매를 타던 기억이었다. 어머니를 기쁘게 하기 위해, 어른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새로운 공부와 경험을 위해 떠났던 오두막 옛집, 화려한 권력과 아름다운 부귀영화를 모두 누린 뒤 죽음의 문턱에 이르러 그가 간절히 찾던 기억은 어릴 적 아무 욕심없이 순수하던 어린 날의 눈썰매였다.
그 유명한 신사가 죽어가며 찾던 로즈버드의 의미가 무엇인지, 사람들은 계속 찾아내려하지만 결국 못 찾고 신사는 잊혀진다. 그의 수많은 유품이 분류되고 버려지는 마지막 장면 속, 버려지는 눈썰매에 적힌 이름 하나를 보며 시청자들은 그제서야 그 화려한 외면 속에서 그가 평생 갈구하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평생 성공을 누리며 부와 권력을 탐하던 그의 내면의 피로함을 깊이 느끼며 숙연해질 수 밖에 없게 된다. 그토록 외향적이고 권력지향적이던 그가 진정으로 바랬던 것은 어머니 곁에서 사랑받으며 천진하게 놀던 어린시절로의 회귀였던 것이다.
캐인만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들 모두에겐 마음 깊은 곳 찾고싶은 무엇들이 있다. 캐인처럼 죽기 직전에 알게 될 것인지, 그 이전에 깨달아 스스로 찾아볼 지는 내 자신에게 달려있다. 지금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는 것들, 하등 먹고사는데 쓸모없이 여겨지는 것들, 남들이 볼 때는 경제활동에 도움되지 않아보이는 여러가지 것들은 어쩌면 내가 이 삶을 살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들일런지도 모른다.
어릴 적 대중가요에는 이제서야 깨닫게 되는 심오한 가사들이 많다.
"스치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어느덧 내게 다가와 종잡을 수 없는 얘기 속에 나도 우리가 됐소. 바로 그 때 나를 비웃고 날아가버린 나의 솔개여. 수많은 관계와 관계 속에 잃어버린 나의 얼굴아. 애드벌룬 같은 미래를 위해 오늘도 의미없는 하루. 준비하고 계획하는 사람 속에서 나도 움직이려나. 머리들어 하늘을 보면 아련한 친구의 모습. 수많은 농담과 한숨 속에 멀어져간 나의 솔개여" <이태원, 솔개>
피아노도 좋고 스케이트도 좋다. 내가 원하는 일을 시간을 내어 하나만 해보자. 비록 마음이 바쁘고 혼란하여 흉내내기에 불과할지라도 그 끈을 놓지 말자. 그 일을 하는 동안은 일상에 벌어졌던 일을 여과하여 거짓은 잊고 중요한 것을 선별해 기억해내자. 일체의 영향이나 거짓, 흘러가버리는 일상, 내 눈을 가리는 조작에서 벗어나 정말로 내가 누구인지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시간을 잠시라도 가진다면 그 속에서 이 삶을 살아낼 힘을 얻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