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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필가 박신영 Aug 14. 2017

피아노 앞에서 솔직하게

컨서버토리 전공실기수업에서 배운 것

     피아노 공부를 시작하기로 마음먹고 백석 컨서버토리에 입학 후 전공실기수업 첫 시간.  조율을 처음 배울 때도 그러했지만, 음악공부를 해보겠다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첫 수업에 임하여 수업내용을 확인할수록, 두근거리던 마음은 차츰 가라앉으며 눈은 경악에 점점 커진다. 이럴 줄 몰랐다며 자책도 해 본다.


     음대수업은 여덟번의 전공실기 수업을 필수로 거친다. 전공실기 수업은 특별한 내용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 서로 연주하고 감상하는 수업이다. 일주일에 하루 수업이지만 그 하루의 연주를 위해 방학 때도 매일 쉬지 않고 연습한다.

    첫 시간에는 수강생들이 학기중 있을 2번 또는 3번의 연주 순서를 정한다. 교수님 재량에 따라 정해주시기도 하고 학생들과 함께 정하기도 한다.     

이 연주회를 간단히 '위클리(weekly)' 수업으로 칭한다.  피아노, 성악, 플룻, 리코더, 바이올린, 첼로 등 여러 다른 악기전공생들이 각자의 연주곡을 정한 순서대로 앞에 나와 연주하고 다른 학생들은 자리에서 감상하게 된다.

     전공실기 수업에서는 weekly 연주 2회,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이렇게 4번의 연주를 하게 되는데, 중간고사, 기말고사 때에는 교수님들 앞에서 평가를 받고 weekly 연주 때에는 함께 수강한 수강생들 앞에서 연주를 한다.  연주곡은 커리큘럼에 있는 범위에서 (주로 음악의 시대적 배경 또는 작곡가를 언급한다) 정하여 2~3곡 정도 준비하게 된다.  연주 당일에는 연주 복장과 시선, 걸음걸이, 곡에 대한 잠깐의 멘트, 악기를 연주하기 전과 연주 후 마무리까지 꼼꼼히 지도받는다.

     실기수업이 이런 상황인지 모르고, 다들 조금이라도 먼 날짜를 잡기 위해 손을 번쩍번쩍 드는 학생들 틈에서  어리둥절해하던 첫 수업날, 나는 다행스럽게도 학교생활에 큰 도움을 받게 될 학우를 만나게 되었다.

     3개월 뒤 기말고사일, 모든 가식과 허식이 타파되고 멘탈붕괴의 상황에서 고등학교 이후로는 말하지 않던 '(창피해) 죽고싶다' 는 말이 절로 입에서 터져나오며 절망감으로 가득찬 시험을 마친 후, 이 학우와 함께 낙지볶음과 스타벅스를 먹지 않았다면, 견딜 수 없는 창피함의 나락 속에 다음 학기 등록은 커녕 피아노라는 악기를 영영 잃어버릴 뻔 했으니, 이 날의 인연이 참으로 소중했다.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도 때로 피아노 앞에 앉기는 했었지만, 연주할 곡을 정하고 연습을 위해 피아노 앞에 앉는 것은 새로운 느낌이었다. 시험은 물론이거니와, 정해진 날짜에 학우들 앞에서 연주해야한다는 부담감 때문이었다. 솔직히 피아노가 좋아서 더 공부하고자 한 것이지 누구에게 내 연주를 들려주기 위해 시작한 것이 아니었다. 내 연주는 그저 나만을 위한, 나만 들으면 족한 연습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들려줄 정도의 실력도 아니고 그럴 수준이 될 때까지 곡을 열심히  연습해본 적도 없었다. 다른 학우들은 방학  때 미리 악보를 보고 사전에 연습을 다 끝냈으리라 생각하니 더더욱 마음은 초조했다.


    그런 중에도 피아노 앞에서 악보를 대하면 즐거움이 있었는데, 그것은 내가 "살아있다"는 생생함이었다.

    

    나이 마흔이 넘어가다보니 사회인으로 덕지덕지 붙은 많은 것들이 나 자신의 외피를 두텁게 형성하고 있었다. 사람을 대하거나 일을 할 때 왠만큼 정제된 태도, 잘은 모르더라도 그간의 경험을 적절히 응용하여 능숙하게 보이도록 하는 방법, 어떤 일에 처해도 내 마음 저 깊은 곳까지 닿지 않게 하는 방어막 같은, 내가 나를 지키기 위해 갈고닦은 노하우들은 견고한 성이 되어 나를 감싸고 있었다. 사회에서 만나는 이들은 그런 쪽으로 능숙했고, 나 또한 그들을 따라가는 그런 일상은 자연스럽고 당연했다.


    그런데 지금 내가 알고있는 이 사실, 이제는 명확히 말할 수 있는 이것은, 내 자신이 그러고 있다는 것조차 스스로 전혀 눈치 못 채고 있었다. 너무나 오랫동안 쌓인 켜켜한 먼지들이 먼지인줄도 모르게 딱딱히 굳어져 내 살이 되어있었다.

 

     피아노 앞에 앉아 바흐의 이탈리안 콘체르토 를 연습하는 동안 느낀 감정은 새로운 경험이자 깨달음이었다. 언제 마지막으로 느껴봤는지 모르는 '생기'와 오직 그 하나만 볼 수 밖에 없는 '집중'이 있었다.

     '피아노 앞에서는 숨길 수 없다. 다 보인다. 피아노와 나 밖에 없다' 던 교수님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렴풋이 느끼는 날들이 하루하루 지나갔다. 그리고 그 클라이막스가 6월 초의 기말고사였다.


    중간고사 때는 위클리 수업 때 늘 보던 교수님 세 분이 평가를 위해 기다리고 계셨다. 그래서 조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연주할 수 있었는데,  기말고사에셔는 곡도 두 곡 이상이 되고 평가도 수업 때 늘 뵙던 교수님이 아니라 학교에 계신 전공악기담당 교수님은 다 오신 듯 6~7분이 기다리고 계시니 들어가는 순간부터 떨린다.

   학생들끼리의 위클리 때는 서로 일과 공부를 병행한다는 동병상련, 나이들어 음악을 잊지 못해 음악의 끈을 놓지 않고 공부를 시작했다는 공통점이 그 바탕에 있기에 왠지 편안한 마음이었지만 교수님들 앞에서. 정말 처음 보는 분들 앞에서  내 민낯같은 연주를 드러내는 것은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창피함이었다.

    우리끼리의 위클리 수업을 대충 대충 때우려했다는 말이 아니라, 그저 그 기말고사를 치루는 동안 스스로 내 음악에 대한 태도가 어떠했는지 적나라하게 인식하게 되었다고나 할까. 그 경험은 내 음악에 대한 태도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대할 때의 내 마음가짐까지 돌아보게 만들었다.

   내가 생각해도 오래 들어줄만한 연주는 아니었다. 암보가 기본인 시험에서, 잊어버려 다시 시작하기도 하고 맴돌기도 하고 시선 둘 곳 없이 허망한 눈빛과 손놀림. 생각보다 일찍 종소리가 울리고 몇 분도 안 되어 빠져나온 고사장. 미리 시험을 마친 학우와 함께 매운 낙지볶음을 먹기로 했다. 그 이후는 앞서 말했던대로이다.  죽고싶다 이런 창피함은 처음이다. 내내 정신없이 중얼중얼거렸다ㅡ. 스타벅스에 와 커피 한 모금을 마시니 겨우 정신이 들었다. 가만히 그 순간을 돌이켜본다.


    내 정신이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느낌. 피아노와 나 그 사이에 아무것도 없었다. 이것은 그냥 실전이다. 연주다. 여태 그렇게 살아온 것처럼 손으로 끄적끄적, 머리로 그냥저냥, 뭉뚱그려 얼버무리고 말로 적절히 가릴 수 있는 것이 아닌. 피아노와 나 사이에 무엇도 없는. 내가 내는 피아노소리와 그 소리를 듣는 귀 사이에는 뭉뚱그리고 얼버무리고 '척'할 수 있을만한 꺼리가 손톱만큼도 없는. 완벽히 발가벗겨진 민낯.  그리하여 음악 앞에서 그 어떤 것도 포장할 수 없는 순간, 바로 연주하는 그 시간이 내 앞에 있었던 것이다. 20년의 직장생활로 얻은 노하우는 전혀 빛을 발할 수가 없었던, 그런 순수한 순간을 방금 겪었던 것이다.


     이제 네 번 째 학기를 앞에 두고 있다. 첫 번째 기말고사를 마치고 마음먹었던 비장한 결심이 무색해지는 요즘이다.  피아노 앞에 앉아 악보를 보며 느끼던,  내가 살아있음의 생생한 순간, 피아노 앞에 가장할 수 없이 순수한 음악의 순간도, 어쩌면 조금쯤 포장할 수 있게 된 것 같은 지금이다.  연습은 피곤하게 느껴지고 연습을 못하며 느껴지는 죄책감과 아쉬움도 만성이 되고, 위클리연주 준비도 학우들은 이해해주리라 믿으며 전처럼 긴장하지 않는다.

   그날로부터 겨우 일년 쯤 지났는데, 나는 또 적당해지려 하는 것 같다. 음악을 공부하기 전의 그저 적당하던 내가, 충격 속에 다시 새롭게, 음악 앞에서는 철저히 민낯이기로 한 나를 잡아먹으려 한다. 이렇게 금세..

그 날의 나를 다시 한 번 본다. 이런 큰 충격을 받은 내 얼굴은 어떤가 하고 찍은 사진은 너무나 멀쩡했지만 표정은 왠지 스스로를 비웃는 것 같다. 이 날의 사진이 있어 다행이다. 잊지 않고 싶기에.

 

  더 솔직하게..척 하지 말고 순수하게.

  전심전력으로 다가가야지만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무엇이든 다만 바라볼 때가 좋았던 것도 같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도 있기에.

   이것이 생기면 저것도 생기기에.

  

   그러나 지금은 내가 늘 바라만 보던 순간이 아니다. 바라던 순간을 이루고 있는 중에 있다. 어쩌면 안 끝날 것만 같은 순간이라 시시때때로 포기하고도 싶다.  하지만 묵묵히 감당하고 지내고나면  언젠가 내가 만나고싶은 순간도 올지 모른다.

    민낯으로 피아노와 만나, 내 마음도, 상대방의 마음도 울릴 수 있을 순수한 소리를, 부끄러움도 창피함도 없이 들려줄 수 있을 그런 순간.


     아주 아주 느린 걸음이더라도,

     끈기있게 집중하고 솔직하게.

     한 번 가보기로.

     그렇게 하기로 다시 한 번 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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