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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필가 박신영 Sep 14. 2017

악보단상

악보, 건반 위의 지도

     어제는 교수님의 최후 통첩을 듣고 집에 와서는 멍하니 있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다급한 마음에 새벽에 일어나 졸린 눈을 비비고 피아노 앞에 앉아 멍하니 스케일연습을 하다보니 서서히 잠이 깼다.

  

     다음주 레슨 시간까지 비창 3악장을 암보해오지 않으면 안 가르쳐주시겠다고.. 2년여를 배우는 동안 이렇게 강력한 경고는  처음이다. 그동안 나름 요리조리 잘 피해가고 있다고 생각했던 건 나의 착각이었다. 연습을 안하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니 전부 눈에 보였으리라. 아니 어쩌면 그동안은 내가 음악을 배우는 이유가 단순히 취미생활 정도일 것이라고  판단하셨던 교수님이 취미 이상일 수도 있겠다는 결론을 내리신 건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난 덕분에 다짐만 하고 지지리도 안하던 연습을 제대로 시작하게 되었다.



       어제 레슨시간엔, 마디마다 아니 한 박자마다 따로 따로 연습하는 방법에 그냥 울고 싶었다..  실지로는 10분도 안되는 시간이었지만, 요즘 읽고있는 베토벤의 전기 중 이 장면이 떠오르며 내가 어린 베토벤 같다는 생각을 한, 내 나이 40대..


   [심한 술고래인 궁정 음악가 요한 베토벤(그는 테너였고, 성악과 피아노를 가르쳤다)은 뛰어난 재능을 보이는 아들에게서 자신이 세속적으로 구제될 기회를 발견하여, 제2의 모차르트를 만들겠다는 무자비한 작업을 시작했다. 처음부터 베토벤은 아버지의 야심에 휘둘려 큰 희생을 겪었다. 그의 집에 찾아간 손님들 가운데 어린 소년이 울면서 연습하는 모습을 본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또 창고에 갇히거나 굶은 채로 연습하기도 했다. 고주망태가 되어 한밤중에 술집에서 돌아온 요한은 걸핏하면 잠이 든 아이를 깨워 억지로 피아노 앞에 앉히고는 새벽까지 연습하게 했다.]       

-제러미 시프먼, <베토벤 그 삶과 음악> page19-

(p.s. 이 글을 읽고 ' 그 위대한 베토벤도 이렇게 혹독하게 열심히 연습을 했구나 '라는 생각)

      

    사실 최근 몇 주간 배우는 방법은 작년 3월 처음 레슨받을 때 잠깐 가르쳐주시던 방식이다. 그 때 나의 저항에 부딪혀 그 방식 대신 당시의 내가 따라올만한 교수법을 택하셨다. 아마 이 영어단어 외우듯 하는 공부방법을 그 때 지속했더라면 더 일찍 수강을 포기했을지도, 그래서 이 글도 없었을 지도 모르겠다.


    어찌되었건 교수님은 근근이 지금까지 이어오는 내 모습을 보시고 이제는 시동을 걸어도 되겠다고 판단하신 듯 하다. 그 때는 싫었지만 지금은 꼭 필요한 공부. 대신 준비는 철저해야지만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인정받은 듯 하여 잠시 기뻤고 한편으로 이제 진짜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TV광고 중에 발걸음 총총총 귀여운 광고가 있다.

검지와 중지에 화이트 부츠를, 엄지에 핑크핸드백을 들고 미니스커트 입고 계단을 내려오는 왼손 ♡

   어제 SCALE 연습의 효과 에 대한 글 중 마지막 문구가 '스케일 연습을 통해 피아노의 지형을 파악할 수 있다' 였다. 이 글 때문이었을까. 오늘 피아노 연습을 하는 내 손가락들이 건반 위에서 제 갈 길을 찾아가는 발걸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악보라는 훌륭한 지도를 두고, 피아노라는 울퉁불퉁하지만 아름다운 소리를 가진 땅에서.

베토벤이라는 창조자가 만든 새로운 세상을 만나기 위해 한걸음씩 앞으로 나아간다."

 

    이런 생각이 드니, 얼마전 유튜브에서 본 세계최대의 동굴이라는 베트남의 산동동굴 이 처음 발견된 때가 생각나면서 앞으로 하나씩 둘씩 미지의 세계를 찾아가는 발걸음을 부단히 옮기고 싶다는 욕심도 들었다.


      이미 잘 만들어진 훌륭한 지도는 사후 70년이 지나 무료배포이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엄하지만 친절한 교수님. 도움과 격려를 아끼지 않으며 함께 각자의 새로운 세상을 발견할 탐험대 우리 학우들.  사기 충천한 마음으로 다시 또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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