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나 혼자 있어도 될까

by 빛기


언제부터였을까. 혼자가 이렇게 익숙해진 것은. 아무래도 세 네살 먹은 어린 시절부터 할머니집에 맡겨져서 밭일을 하는 할머니를 기다리는 동안 홀로 집을 지켰던 시간이 많아서였을까. 할머니가 새벽부터 집을 나간 뒤 혼자가 되어 맞닥뜨린 허허 벌판 같던 정적 속에서 나는 제법 흥미로운 걸 찾아 혼자서 뛰놀던 아이였다. 가장 즐겨 했던 건 인형을 들고 역할극을 지어내거나 벽에다 그림을 그려서 할머니한테 혼쭐이 나기도 했었지. 아직도 내 까마득한 어린 날들을 더듬더듬 머릿 속으로 펼쳐보면 토끼 얼굴에 몸이 커다란 삼각형이었던 그림이 할머니집 마루와 이어진 벽에 턱, 하니 자리를 잡은 걸 두고 놀러오는 사촌마다 “이게 뭐야?” 라고 물으면 “내가 그린 그림.”이라고 대답했던 게 기억난다. 그 놀이가 슬 지루해지면 나는 밖으로 나가 흑염소에게 말을 걸고, 자전거를 타다 구르고, 개울에 있는 올챙이와 개구리들을 구경하다가 할머니가 가까운 고추밭에서 고추를 딴다고 하면 근방을 기웃거리며 “할머니~!!!”하고 목청껏 소리쳐 부르곤 했었다. 모여 지내는 마을 사람들이 몇 되지 않아서 이웃 할아버지 집 손녀가 놀러올 때면 그 친구와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했지만 꽤 많은 시간을 혼자 보냈다. 초록 잎사귀 우거진 골목길을 우두커니 서서 나를 에워싼 고요한 풍경들을 두리번거리다 발견한 사마귀에 놀라 엉덩방아를 찧기도 하고, 울어도 나를 달래주는 사람이 없으니 잘 울지도 않았던 아이. 때로는 엄마에 대한 그리움에 사무치거나 혼자가 되었다는 외로움에 먹먹해져도 그 막막함을 뚫고 금세 나아가던 작은 발자국. 그 발자국이 커진 지금, 여전히 혼자 있는 시간이 많고 혼자 있는 시간이 가장 편안한 어른이 되었다. 어쩌면 나는 혼자를 오랫동안 연습해온 사람. 혼자 있게 되는 시간이 전혀 어색하지 않고 때로는 외로움마저 까마득히 잊은 듯 너무 아무렇지 않아서 조금 걱정스럽기까지 한 그런 사람으로 자랐다.


사실 10대 때는 하나, 둘, 셋까지.. 동생들이 줄줄이 생겨나고 복작복작한 집에 6명의 가족이 부대끼며 사는, 절대로 혼자가 될 수 있는 틈이 보이지 않는 날들을 거쳤다. 혼자만의 시간도, 공간도 확보할 수 없는 상황이 나는 못내 불편했고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가 많았던 것 같다. 학교를 다니면서 친구들을 사귀고 마음 맞는 친구들과 무리를 지으면서도 나는 늘상 함께 어울리는 것보단 혼자인 시간이 좋을 때가 많았다. 빨리 집에 가서 컴퓨터를 키고 한창 소설을 쓰며 활동하던 카페에 접속하고 싶었고, 만화방이나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읽고 싶어서 학교가 끝나기만을 기다리며 얼마나 두 발을 동동 거렸는지. 신나게 뒷문을 나설 무렵 함께 놀자는 친구의 제안에 선뜻 거절하기도 어려워하는 성격이어서 종종 마지 못해 친구들과 어울리는 시간도 있었다. ‘미안. 오늘은 나 혼자 놀고 싶어.’ 그 말이 입가에 계속 맴돌았지만, 혼자 놀고 싶다고 말하는 아이는 어딘가 이상해보일 것 같았다. 친구들에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것 같지 않았다. 내가 혼자 있고 싶다는 게, 너랑 같이 놀기 싫다는 말처럼 들릴까봐 조심스러워서 나는 말을 아끼고, 혼자가 되고 싶었던 갈증도 뒷전으로 미루고 내가 원하지 않았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물론 친구들이랑 노는 게 더 재밌을 때도 많았고 내 마음과는 다르게 행동할 만큼 친구들이 좋았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때부터 나는 내 인생의 커다란 모순에 직면하게 된 것 같다. 아이러니. 아이러니만큼 나를 잘 설명할 수 있는 단어는 없어서, 스무살이 되어 처음 쓴 글은 나에 대한 모순투성이인 것들을 나열한 내용이었다. 내 안의 창과 방패는 서로를 겨누느라고 쉴 틈이 없이 바빠서 나는 혼자 있어도 생각이 많아 피곤한 사람이었고, 여럿과 있으면 그 여럿의 마음을 살피고 눈치를 보느라 힘들었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혼자 가고 싶어했던,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냉정한 빗금을 그어두고 그 선을 넘지 말라는 눈빛을 들키곤 했던 이기적인 애. 그애가 바로 나였다. 그래서 나는 엄마, 아빠가 내게 했던 잔소리 중에 ‘너는 너밖에 모른다.’ 는 말을 가장 싫어했다. 그건 나의 밑바닥을 들추는 진실에 가까운 말이기도 했으나 나를 너무 몰라주는 말이기도 했으니까. 나는 나밖에 모르는 시간이 필요한 사람이었다. 철저히 혼자가 되어 채우는 에너지로 다른 사람들에게 에너지를 줄 수 있었던 사람. 하지만 쉬이 내가 가진 모순을 꺼내보일 순 없어서 나의 그런 생활이 어쩌면 위선이고, 가식을 두른 행동 같아서 죄책감을 키웠다.


30대가 된 지금은 고양이 두 마리와 여동생과 함께 살고 있다. 20대에는 대학교를 타 지역으로 오면서 기숙사 생활을 하고, 현실적인 이유로 여러 룸메이트를 만나서 지내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방은 혼자 썼다. 그래도 완벽히 혼자인 채로 지낼 순 없었고 타인들과의 느슨한 연결을 통해 안정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혼자서 밥을 먹고, 혼자서 산책을 하고, 전시를 보고, 글을 쓰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면서 돌아오는 길에 혼자인 내 그림자가 썩 마음에 드는 날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날도 있었다. 어쩌면 나는 누군가를 의지할 수 없는 사람인 건가? 누군가와 평생 가까운 둘이 될 수 없으면 어떡하지. 사실 애착유형 검사에서 혼란애착, 회피애착 결과지를 받았던 적이 있는 터라 사람들과 잘 어울리다가도 나의 가장 깊숙한 곁은 잘 내주지 않으려는 스스로에게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하나씩 문제를 삼다 보면 문제가 될 만한 것들은 끝없이 쏟아져 나와서 또 나를 괴롭히고 싶지 않았다. 어떤 사람의 성격이나 행동, 벌어진 사건에 대해서 자꾸만 분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일도 그만 두기 시작하면서 ‘그러면 뭐 어때. 그게 그 사람이고 이게 나인데.’ 하는 결론에 이르기도 했다. 자꾸만 누군가에게 설명하고 해명해야 할 것 같은 강박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좋아하는 사람에게 모난 부분을 들켜서 실망을 주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둘러댄 거짓말도 그만하고 싶었다. 이젠 그냥 솔직하게 말하고 싶었고, 조금씩 말할 수 있게 됐다. “나 혼자 있고 싶어서. 혼자 쉬고 싶어서. 혼자인 시간이 너무 필요해서.”


30대의 나는 그런 연습을 하고 있다. 더 이상 이유를 찾지 않는 연습. 나도, 상대도 쉽게 판단하지 않는 연습. 오랫동안 메고 다니느라 낡고 헤져버린 가방에서 소지품을 꺼내듯 주섬주섬 담백하게 나를 꺼내보이는 연습.



카페에서 진짜 자기 모습을 잃지 않고 살아내느라 치열하게 방황하고, 고민하고, 끝내 마음에 쏙 드는 것들만 골라 스스로에게 잘 어울리는 옷을 입은 채 박수갈채까지 받게 된 료씨의 삶을 보면서 고백같은 이 글을 쓰게 됐다. 료 씨도 나처럼 꽤 많은 시간을 혼자 보냈던 사람이었으나 늘 시선은 다른 사람들에게, 세상에게 향해 있던 분이셨다. 무엇이 아름다운지, 어떤 사람과 풍경이 빛이 나는지 그 장면을 바삐 눈으로 좇고 생각하려면 혼자의 몸집을 키워야만 했다. 홀로 듣고 곱씹고 기록하고 응시했던 사이에 삶이 나에게 모질게 굴 때도 견뎌낼 수 있는 정신적인 맷집이 키워졌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늘 혼자인 시간에 유령처럼 생각의 벽돌을 쌓아 집을 짓고 있는 것은 아니다. 혼자 집에서 노래를 틀어놓고 1시간 동안 춤을 출 때도 있다. 거의 혼자 뮤직뱅크, 음악중심 비슷한 걸 찍고 있다. 한창 그럴 때는 살도 빠지고 스트레스도 풀리고 좋았다. 또 내가 좋아하는 혼자인 순간 중 하나는 세상 프리한 차림으로(요새는 출근할 때는 절대 못 입는 땡땡이 바지를 입고 바지 끝단을 땅바닥에 질질 끌며) 카페에 가서 책을 읽다가 카페에 흘러나오는, 책 속 글귀보다 훨씬 더 황홀한 노래 가사에 마음을 빼앗길 때. 그 가사를 노트에 잔뜩 휘갈겨 쓰고 집에 돌아와서 어떤 노래인지 검색해서 알아보는 재미가 또 짜릿하다. 또 비효율적인 동선으로 귀여운 간판을 내걸고 있는 가게들을 구경하며 거리를 활보하다가 집으로 돌아온 후 2만 보나 찍혀있는 걸음 수를 보며.. ‘역시 낭만은 비효율적일 때 완성되는겨…’ 하고 쏟아지는 잠에 못 이겨 하루를 맺는 등, 혼자서 시트콤 한 편 찍듯이 보내는 날들도 많다.


그런 날들이 모여 지금의 내가 됐다. 그리고 나는 지금의 내가 좋다. 혼자서도 충분히 웃기고 재밌는 내가.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 동경하고 존경하는 사람들과 늘 함께 있지 않아도, 거기서 똑 떨어져 나와 있어도 홀로 씩씩하게 존재할 수 있는 내가. 하지만 나의 혼자가 이렇게 당찰 수 있었던 건 늘 그 자리에서 내 뒷모습을 향해 조심히 잘 다녀 오라고 손 흔들어준 소중한 존재들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걸 다시금 잊지 않으려고 한다. 가끔은 혼자인 시간을 포기하고 엉겨붙어 있어야지! 싶을 만큼 좋은 그들이, 여전히 내 삶과 이어져 있기 때문에. 자세히 돌이켜보면 혼자인 시간에 누리는 것들조차 결국엔 다른 사람들의 손 끝에서 시작해 내게 도착한 것이며, 결국 음악도 영화도 책도 다 누군가의 곁에 잠시 머무는 일이나 다름 없으니까… 어쩌면 완벽한 혼자가 되는 일은 평생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불가능한 것들을 꿈꾸는 어린 애가 아니다. 내게 가능한 것들만으로도 충분히 채워질 수 있는 어른이 되었으나 앞으로 더 많은 것들을 가능하게 만들 수 있으리라는 믿음도 새싹처럼 매일매일 새롭게 돋아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건, 더 이상 내 안의 창과 방패는 서로를 겨누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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