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싱을 하며 배운 것
복싱은 기대 없이 한 것이 아니다. 기대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복싱으로 운동선수 할 것도 아니고, 돈을 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순발력이나 운동신경이 좋아서 남들보다 잘한다는 우월감을 느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사회적으로 여자가 복싱하는 것이 칭찬받을 일도 아니었다. 운동할 거면 복싱처럼 굳이 위험한 스포츠를 선택할 필요도 없었다.
그냥 했다. 다 모르겠고, 내 삶이 부유하고 있는데 철학 스승님이 ‘운동하라’고 동아줄 하나를 내려줬으니까, 믿고 안 믿고를 떠나 일단 잡아본 것이다. 일단 해봐야, 되는지 안 되는지 할 말이 생길 테니까.
기대할 수 없는 것을 하면서 기대 없이 하는 것에 대해 알게 되었다. 복싱을 하면 복싱 외에 아무것도 신경 쓸 게 없다. 기대하는 것이 없으니 어떠한 목적도 목표도 없다. 그냥 잽이 잘 될 때까지 계속할 뿐이다.
그런 시간들이 쌓여 알게 되었다. 생각은 너무 오염되어 삶의 진실을 보지 못하게 한다. 몸으로 할 때만 진짜로 알 수 있다. 나는 이제 내가 무엇을 잘하는지 재능이 있는지 고민하지 않는다. 그냥 계속 즐겁게 할 뿐이다. 내가 계속 즐겁게 할 수 있는 것이 내가 재능 있는 분야일 테니까.
바라는 것이 있었다면 감각을 묻어두고 느끼지 못했을 것 같다. 거대한 목표를 향해 달리기 바빴을 테니까. 자본주의는 나를 관념주의자로 공중에 붕 떠 있게 만들었다. 나는 몸으로 하는 것을 먼저 했어야 했다. 미디 작곡을 배우기 전에 드럼을 쳤어야 했다. 3D프린팅을 배우기 전에 조소를 했어야 했다. 심지어 나는 스포츠도 사격이 좋았다.
자본주의에서 몸으로 하는 일들은 환영받지 못한다. 돈을 벌려면 관념적인 것들을 만들어 내야 한다. 복제 가능한 콘텐츠들. 시스템을 구축하고 소유해야 한다. 실제의 시간대로 살면 돈 버는 데 제한이 생기니까.
몸을 쓰는 곳에 행복이 있다는 것. 그것이 자본주의가 은밀하게 감추어 놓은 삶의 진실이다.
점을 배운다. 기본기를 배운다. 잽을 배우고 훅을 배우고 바디, 회피 기술들을 배운다. 그것들을 연결하는 선은 내 몫이다. 가르쳐주는 사람은 그 3차원의 고유한 선을 말해줄 수 없다. 점들을 계속 봐주고 고쳐준다. 그걸 잇는 선은 내 몸이 만들어 가는 것이다.
조소도 마찬가지다. 조소 선생님은 내가 만들어놓은 형태의 점들을 봐주는 것이지, 나의 손과 헤라의 움직임을 가르쳐줄 수는 없다. 드럼도 마찬가지다. 드럼 선생님은 한 음 한 음 치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것이지, 한 음을 치고 다음 음으로 넘어가는 선은 내가 만들어가는 것이다. 결국 몸을 쓰는 것이다. 몸에 집중해서 몸의 감각을 느끼기 위해 반복하는 것이다.
동적인 복싱과 정적인 조소는 언뜻 보기에 상이해 보이지만, 그것들을 하는 나의 상태는 똑같다. 나는 많이 바뀌었지만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나의 점들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하나씩 조금 추가되었을 뿐. 근데 모든 것이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