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복싱 생활체육대회에 나가고 느낀 것
너무 기쁘고 즐거운 하루였다. 세상에 두 발 딛고 사는 기쁨. 부유하지 않고.
쓰고 싶은 말들이 많았는데, 시간이 지나 막상 앉으니 주저리주저리 생각나던 내용들이 머릿속에 한 단어 한 문장만 남아버렸는지 모르겠다.
이 말부터 시작해 봐야겠다.
경기가 끝나고 응원하러 와 준 친구가 물었다. 이번이 세 번째 복싱 경기였는데 지난번 때와 무엇이 달랐냐고. 질문을 들었을 때 생각나는 대로 말한 대답은 이랬다. 처음엔 죽음 앞에 선 것처럼 내 삶이 막 주마등처럼 지나가고 별사람이 다 생각나고 막 내 인생을 다 건 것처럼 비장했는데, 이번엔 그냥 복싱이라는 삶의 한 부분 정도로 느껴졌다고.
이 질문이 계속 나를 생각하게 해서 다시금 돌아보았다. 첫 경기때는 정말 너무나도 무겁고 비장하고 심각했는지. 지금 생각하면 너무 웃기는데 정말 죽으러 가는 사람처럼 울컥하고 별생각이 다 나고 내 인생 내 삶을 걸고 싸운다고 생각했었다. 두 번째엔 내 한 몸 건다고 생각했다. 맞아도 때리겠다고 엄청나게 다짐했던 것 같다. 세 번째인 이번엔 단지 그 순간을 건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열심히 한 번 해보겠다고.
쓰고 보니 내가 걸었던 것만큼 내가 얻는 건가 싶다. 인생을 걸고 나니 내 인생의 소중함을 곁에 있어 준 사람들을 알게 되었고. 맞아도 물러나지 않겠다는 결심만큼 나는 그런 사람이 되었다는 믿음을 얻게 된 것 같다.
결심한다는 건 의심한다는 거였다. 이번엔 그런 결심을 하진 않았다. 바디를 맞아서 주저앉게 될 순 있지만 내가 피하지 않을 거라는 건 알았다. 이번엔 뭘 얻었을까. 이제 언제든 나는 할 수 있을 거라는 잔잔한 확신을 얻은 것 같다.
첫 경기는 코로나 때라 관중도 없고 지하의 링만 있는 작은 곳에서 경기를 했는데, 두 번째 때는 큰 강당에 사람도 이번 경기의 세 배나 많은 곳에서 했었다. 그때 좀 새로운 경험을 했다. 사람들의 열기와 분위기를 경험하면서 하나의 축제 같은 일이구나 생각했다.
두 번째엔 운 좋게 이겼는데, 첫 번째 경기 때 풀지 못한 의구심을 해결했다.
첫 번째 경기만 했을 땐 링위에 올라선다는 도전 자체의 의미와 승패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 경기는 졌지만, 도전한 것이 대단하다고 하는데, 그게 얼마만큼인지 어디까지인지 위로의 말인지 합리화인지 나 자신도 잘 몰랐다.
첫 경기에서 한 번 진 후 두 번째 경기에서 한 번 이겨보니까 확실히 알게 되었다. 링 위에 올라선다는 것이 더 큰 의미라는 것. 승리에 집착했으면 공허했을 거다. 물론 이겨서도 좋았지만, 이겼다는 승패보다 그때 응원하러 와 준 친구들에게 보답한 것 같아서 좋았다. 와 줬는데 이겨서 함께 기쁠 수 있는 게 좋았다. 상대가 잘하는 사람이 아니어서 이겼다고 하긴 개인적 승패로는 사실 좀 부끄러웠다.
꿈은 배경 이미지라고 하던데 내가 꿈꿨던 승리의 이미지는 사람들과 와아!! 팔을 흔들며 소리 지르는 거였는데 딱 그런 날이었다.
사실 나는 생체 경기를 또 나갈 생각이 없었다. 같이 철학 공부하는 친구가 복싱을 시작하면서 생체에 나가게 되면 같이 하자고 해서 알겠다고 한 게 계기였다. 연말에 나가볼지 생각 중이라고 했었는데 생각보다 일찍 하게 되었다. 우리 둘의 생각보다 그 시기가 좀 일찍 오긴 했지만, 원래 선택은 들이닥치는 거니까.
같이 대회에 나가는 친구가 잘하겠지 하면서도 링 위는 혼자 싸우는 거니까 어떻게 해줄 수도 없고 걱정이 되었다. 실력 차 나는 잘하는 사람이 나와서 친구를 막 때리면 어떡하나 했는데, 친구가 경기 때 너무 잘해서 환희였다. 걱정했던 마음도 날아가고 친구가 잘해서 또 기쁘고 비록 내 경기는 졌지만, 응원하러 함께 와 준 친구들과 즐거운 하루였다.
이번엔 친구의 첫 경기, 내 실력이 어느 정도 됐는지, 한바탕 즐길 축제에 대해 주로 생각했다. 친구들 모두가 다 모여서 응원할 땐 대회장이 우리 세상이 된 것 같았다. 목소리를 내며 어디든 우리의 영토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것 같아서 좋았다. 주변에서 응원단이 왔냐고 했다고 한다. 정말 한바탕 즐기는 축제 같은 날이었다. 그리고 감량하느라 못 먹었던 음식도 실컷 먹었다.
운동을 하면서 신체적 성장과 정신적 성장이 있다고 느꼈다. 복싱은 그 두 트랙을 참 잘 느낄 수 있는 운동인 것 같다. 신체적 능력만 있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마인드만 가지고 되는 것도 아니고.
사실 나는 복싱이라는 운동에 정말 어울리지 않는다. 운동 근육이 생길 성장기에 나는 아무 움직임도 하지 않은 몸이기 때문에 30대가 되어서 하려니 잘 안됐다. 복싱에 중요한 민첩함 탄력 이런 것과 내 몸은 거리가 멀다. 운동을 다니면서 새로 온 회원들을 보면서 알았는데 나는 정말 느리게 늘었다. 회피하고 그런 건 지금도 잘 안된다.
같이 연습하는 친구가 너는 왜 뚜벅초처럼 뚜벅뚜벅 걸어가서 퍽퍽 때리냐고 왜 그렇게 하냐고 했다. 약간은 기막히면서도 답답하다는 뉘앙스였는데. 나도 내가 그러는 거 안다.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니고 못해서 그런 거라고 나도 내가 그러는 거 아니까 자꾸 그걸로 뭐라 하지 말라고 했다. 그땐 좀 내가 못해서 그런 거니까 듣기 싫었는데, 나는 뚜벅초 같은 내가 맘에 든다. 앞으로도 나는 좀 무식하더라도 뚜벅뚜벅 살고 싶다. 물론, 복싱에서 계속 그러진 않을 거다. 상대 읽는 거랑 회피 연습 많이 해야지.
나는 더 이상 내가 불쌍하지 않다.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과거의 아픈 일들이 괜찮은 게 아니라 그냥 다 날아가서 자유로운 느낌이다. 더 이상 과거의 내가 신경 쓰이지 않는 것에 가깝다. 떠올리면 슬펐던 일들이 떠올리면 괜찮고 힘이 된다.
내가 불쌍하지 않으니까 나 너무 괜찮은 것 같다. 내가 괜찮으니까, 여유도 생기고 강해지는 것 같다. 내가 할 수 있고 해줄 수 있는 게 있는 거 같아서 기쁘고 가득 찬 느낌이 든다. 내가 가진 것도 받은 것도 너무 많은 것 같다.
사실 이번 복싱 경기 때 진짜 세게 맞았다. 여태 맞았던 것 중에 제일 세서 처음 느껴보는 강도였다. 체육관에서 나보다 잘하는 사람은 나를 그렇게 세게 때리지 않는다. 상대가 거리를 잘 잡고, 나는 시합이라 더 뚜벅초처럼 되어서 스텝도 잘 못하고 정타로 제대로 맞았다.
정타로 맞으니까 상대 손이 엄청 매웠다. 내 왼쪽 관자놀이 부분 근육이 탱탱 부었다. 다행히 만지지 않으면 아프지 않으니까 괜찮긴 했다. 이마도 세게 맞아서 헤드기어에 눌린 빨간 자국 같은 상처가 났다. 근데 괜찮았다.
더 세게 때려도 나는 뚜벅뚜벅 걸어갈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