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생활체육대회를 나가고 느낀 것
좋은 삶 베푸는 삶에 대해 성인군자도 아니고, 라는 말을 농담처럼 습관처럼 내뱉다 문득 깨달았었다. 나 비겁했구나. 이거 합리화구나. 그때쯤 글로 써야지 생각하고 쓰지 않았다. 이게 더 무겁게 비겁했다.
지금 돌아보면 아는 데 하기 싫었던 거다. 모르고 무의식적으로 합리화한 비겁함은 어쩔 수 없다 해도.
알았는데 비겁하게 모르고 싶었다. 그냥 글을 미뤘다. 무언가를 못 할 이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다른 일에서는 이런 비겁한 생각을 한 적이 없었는데. 기준이 높아서 문제인 적은 많았어도 말이다. 내가 나한테 찜찜했다. 아마 부끄러움이었을 거다. 언젠가 털어야 할 짐이었다. 넘어갈 허들이었다.
철학 스승님이 나보다 어린 친구가 와서 돈 벌고 싶은데, 그 친구가 돈 벌기 어렵고 힘들다고 하면 뭐라고 할 거냐고 했다. 난 망설임 없이 0.1초 만에 돈 벌기 싫은 거죠. 라고 말하고 아, 말렸다. 말하는 순간 알았다. 나도 어렵고 못 하는 거 아니고, 하기 싫은 거라는 걸 알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고 생각하다 보니 부끄럽기보단 한편으론 뭔가 시원했다. 못하는 게 아니고, 하기 싫은 거면 하고 싶으면 되는 거잖아? 못하는 거라는 절대 넘어지지 않는 1의 벽을 세워서, 49 대 51의 하지 않음을 견고히 해왔던 거라면. 49의 마음만큼은 기뻤다.
옳으냐 그르냐를 말하는 내게 철학 스승님은 항상 그것을 다 담는 대답을 해 주었다. 큰 사람이 되라고. 그런 답을 들으면 난 항상 너무 벙쪘다. 내가 너무 작아 보여서 민망했다. 동시에 내 세계 밖의 대답에 경탄했다.
그래서 그릇은 어떻게 넓어지지? 답은 있다. 한 걸음 한 순간 배운 걸음을 내딛는 것.
누구나 잘 되는 것 잘 안되는 것이 있다. 운동을 해도 더 못하고 힘들고 아픈 걸 더 해야 하는 것처럼. 내가 잘 안되는 걸 하는 건 참 짜증 나고 하기 싫었다. 반대로 내가 잘하는 것에선 한걸음이 어렵지 않았다. 당당해졌다. 내가 잘 안되는 걸 하려니 내가 너무 작아졌다. 운동을 예로 떠올려보면 잘 안되는 걸 더 노력해서 보완해야 한다는 건 너무 명백하다.
철학 스승님은 힘을 가졌을 때 휘두르는 방향을 알려주려 했다. 그 방향의 편을 만들고자 애쓰고 있다. 그 방향은 기쁨을 향해 있다.
나는 힘을 가질 생각에 힘을 어떻게 할 지는 잘 생각하지 못한 것 같다. 힘이 생기면 그저 휘두르고 싶었나 보다. 종종 억울했다. 나는 힘 있으려고 죽을 똥 노력하는 데 힘없는 사람보다 더 욕 먹어서. 나도 아무것도 몰라요. 무해해요. 연기라도 할까,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슬퍼지는 반대 방향으로 힘차게 갈 거면 힘이 없는 게 낫다.
복싱을 해보니 때릴 자신보다 맞을 자신이 있어야 한다. 난 항상 어떻게 때릴지만 생각했었는데. 맞아도 괜찮다는 자신이 있어야 때릴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프고 괴롭겠지만, 그래도 괜찮아. 멀쩡하다거나 완벽한 회피가 자신 있을 순 없다. 많이 맞을 거다. 그래도 괜찮아. 그래도 한번 해 본다.
그리고 여느 허들처럼 해보지 않았을 때만큼 무섭지 않다. 웬만하면 안 하고 싶고 좀 그렇긴 한데, 또 지나고 나면 그렇게 못할 일도 아니라 에라 모르겠다 하고 하게 되는 것처럼.
내 시선은 항상 넓어지는 기쁨 보다, 상처 슬픔에 머물렀다. 그래서 하기 싫었다. 멀리서 잘 모르고 볼 땐 기쁨 따위 미미해 보였다. 복싱도 치고받는 거 보면, 직접 하게 된다고 하면 고통이 먼저 보이지 않나. 피 보이고 아플 것 같고. 그 속에 기쁨이 있다고 말해줘도, 안 들릴 거다.
그렇게 말해줘도 안보이던 기쁨이, 직접 해보지 않아서 알 수 없었던 기쁨이 보인다.
고통 속에 기쁨이 있다고 하면, 고통이 벌써 꽉 차서, 어떤 고통이지? 얼마나 고통이지? 어떻게 고통을 줄이지? 이런 생각만 떠올랐던 것 같다. 이제야 어떤 기쁨이지? 얼마나 기쁨이지? 어떻게 기쁨이 꽉 찰까? 궁금해하게 되었다.
무언가 내려놓는 기분이 들었다. 근데 기뻤다. 무거운 물을 힘겹게 받치던 댐이 무너져 평온한 수면이 된 것처럼.
훨훨 날아갈 거라는 말을 들었을 때 마음이 울렸다. 뭔가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운동화 끈을 너무 오랫동안 묶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