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시온 Dec 22. 2020

스페인의 역사 14

카를로스 4세


스페인은 1700년 이후, 부르봉 왕가의


펠리페 5세, 페르난도 6세, 카를로스 3세의


통치기를 거치면서 조금씩 발전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카를로스 4세에


이르러 발전을 멈추고 퇴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카를로스 4세 출처 위키피디아



카를로스 4세는 1788년 마흔 살에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을 이탈리아에서


자랐기 때문인지 예술을 사랑하였습니다.


이탈리아 출신 작곡가이자 첼리스트


보케리니의 음악을 좋아했으며, 자신의


연주를 위해 명품 바이올린인


스트라디바리우스를 구매하였는데


현재 마드리드 궁전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또 미술을 좋아하여 1789년 프란시스코


고야를 궁정화가로 임명했습니다.



고야가 그린 카를로스 4세의 가족 출처 위키피디아



아버지인 카를로스 3세는 스페인의 가장


훌륭한 왕으로 손꼽히는 반면,


아들인 카를로스 4세는예술과 사냥에


심취했을 뿐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 시기에 유럽은 계몽사상이 널리 퍼지고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 절대 왕정이


무너지는 시기였습니다. 유럽의 다른 왕조는


프랑스 대혁명의 영향이 자신들에게도


닥칠까 두려워했습니다.



당시 스페인의 실권을 잡고 있던 총리는


이러한 시대적 흐름을 파악하고 프랑스에


참견하지 않으면서 나름대로의 개혁을


추진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곧 실각하여


개혁은 추진되지 않았고 스페인은 시대의 흐름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었습니다.



카를로스 4세는 사촌인 마리아 루이사


데 파르마와 결혼 했습니다. 그녀는 관능적이고


바람기가 많은 여인으로 여러 정부를 두었습니다.



마리아 루이사 데 파르마 출처 위키피디아



그 중에 왕실 경비대 출신의 고도이


왕의 마음까지 사로잡아 총리로 임명되었습니다.


왕을 제외한 모든 사람은 고도이와 왕비의


관계를 알고 있었기에 사실을 알렸지만


왕은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마누엘 드 고도이 출처 위키피디아


고도이는 자신의 신분을 높이고, 개인의 이익을


채우는데 급급하였을 뿐 국정운영 능력은


형편없었습니다. 국가 재정이 어려울 때 마다


빚을 내었고 농민들에게 세금을 더 거두어 채무를


막으려 했습니다. 전염병과 기근으로 고통속에


있던 농민들은 곳곳에서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1804년 고도이는 나폴레옹과 협약을 맺었습니다.


나폴레옹군대가 포르투갈을 쳐들어가는데


스페인이 길을 내어준다는 내용이었지요.


즉 스페인에 프랑스 군대가 들어온다는 것인데,


고도이는 나폴레옹에게서 보상을 받기로 하고


협약에 서명을 했습니다. 그 보상은 포르투갈의


1/3을 고도이에게 공국으로 넘겨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1807년 10월부터 스페인을 향해 진군한


프랑스 군대는 4개월 만에 포르투갈을


점령하였습니다. 그리고 프랑스로 철수하지 않고


스페인땅의 요충지에 주둔하였습니다.


1808년 3월 나폴레옹의 군대가 마드리드를


향해 진군했습니다. 카를로스 4세와 고도이는


프랑스군이 쳐들어오자 마드리드 근교의


아란후에스 궁전으로 피난을 갔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된 마드리드 시민들은 무능력하고


무책임한 왕과 고도이에게 분노하여 봉기하였습니다.



군중들은 카를로스 4세를 폐위시키고 그의 아들


페르난도를 페르난도 7세로 즉위시켰습니다.


페르난도 7세는 고도이를 체포하고 모든 재산을


압수하였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스페인의 역사 13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