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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시온 Feb 21. 2021

메디치 6

파치가의 음모


1478년 4월 26일, 피렌체 두오모 성당에서

부활절 미사를 드리던 로렌초 데 메디치와

동생 줄리아노 데 메디치가 공격을 당하였다.

동생 줄리아노는 19번이나 칼에 찔려 그 자리에서 

죽었고 로렌초는 다행히 목숨을 건졌다.


이 사건은 메디치 가의 경쟁 가문이던

파치 가문이 주도 했으며, 교황 식스토 4세도

관련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1434년 코시모 데 메디치가 피렌체 정부의

최고 행정관이 된 이후, 피렌체는 이름만

공화국일 뿐, 메디치 가문이 독재에 가까운

권력을 누렸다. 따라서 메디치 가문을

끌어내리고 싶어하는 경쟁가문이 많았다.

그 중, 파치가문은 귀족 출신이며 유력한

은행가문이었는데 정치적, 경제적으로

메디치 가문과 충돌을 빚었다.


메디치 가문에서는 파치가와의 분쟁을

종식시키려고 로렌초의 누나인 비앙카와

파치가문의 굴리엘모의 결혼을 추진하여

성사되었다.


드라마에서 야코보 데 파치와 로렌초 데 메디치


그러나 굴리엘모의 삼촌인 야코보와 형인

프란체스코 데 파치의 메디치에 대한 증오는

계속되고 있었다.


그 당시 교황은 식스토 4세 였다. 그의 본명은

프란치스코 델라 로베레이다. 그는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로베레 가문의 부와 명예를

드높이는데 과도하게 집착하였다.


교황 식스토 4세 출처 위키피디아


그리하여 6명의 조카들을 추기경으로 만드는 등 

족벌 정치를 한 인물이다. 그는 교황령을

늘리려고 베네치아와 피렌체 사이에 있는

작은 마을 이몰라를 매입했다. 그리고 조카인

지롤라모 리아리오를 이몰라의 군주로 세웠다.


이몰라는 로렌초가 매입하려고 밀라노의

공작인 잔 갈레아초 스포르차와 협상을 하던

중 이었다. 그러나 밀라노 공작은 로렌초가 제안한

금액의 절반만 받고 교황에게 팔았다. 그 이유는

자신의 딸이자 사생아인 카테리나 스포르차

교황의 조카인 지롤라모 리아리오와 결혼시키는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이때 교황의 재정을 지원해준

가문이 파치 가문이었으며 그 대가로 교황의 은행은

메디치 가문에서 파치가문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러한 일들로 교황과 메디치 가문은 갈등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교황은 메디치 가문을 축출하고

조카인 지롤라모 리아리오와 프란치스코 살비아티

피렌체 공화국을 장악하게하여 

교황령을 확대하고 싶었다.


프란체스코 살비아티는 피렌체의 오래된 가문

출신이었다. 그는 피렌체의 대주교가 되고

싶었으나 로렌초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피사 대주교가 되었는데 교황 식스토 4세의

전달자로 피렌체에 들어왔다. 파산 직전이었던

바론첼리가문도 합세하였다.


이들은 메디치가의 두 형제를 동시에 죽여야

했기 때문에 오랫동안 기회를 보았으나

두 번의 기회를 놓쳤다.


1478년 4월 26일 두오모 성당에서 부활절

미사를 지낼 때, 또 한번의 암살을 시도한 것이다.


피렌체 두오모 성당 출처 픽사베이


줄리아노 데 메디치는 프란체스코 데 파치와 

바론첼리의 칼에 찔려 즉사하고,

로렌초는 부상을 입었으나 주변의 도움으로

성당 내부의 성물실로 몸을 피해 목숨을 건졌다.


암살자 프란체스코 데 파치의 동생이자

로렌초 데 메디치의 매부인 굴리엘모 데 파치

자신은 몰랐던 일이라고 외쳤고 성당에 있던 사람들은

경악하며 밖으로 뛰쳐나왔다.


로렌초가 살아있다는 것을 몰랐던 살비아티

대주교는 피렌체 공화국의 정권을 빼앗으려

페루자에서 데려온 용병들을 데리고 시뇨리아

궁전에 들어가 피렌체 공화국의 최고 위원을

위협했으나 곧 체포되었다.


파치가의 사람들은 피렌체 시민들을 향해 메디치의

독재를 끝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피렌체

시민들은 메디치 가문의 통치기간에 생활이

윤택해졌고 평화로웠다는 것을 고마워하며

메디치 가를 옹호하였다.


시민들은 사건의 전모를 알고 광분한 채

음모자들을 색출하기 위해 무기를 들고

돌아다녔다. 이때 무려 80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었다.


지롤라모 리아리오는 당시 피렌체에 없었기

때문에 무사했다.


주동자였던 파치가의 인물들과 살비아티 대주교는

시뇨리아 궁전 (현재 베키오 궁전) 2층 창문에 목이

매달려 죽은 채 오랫동안 그대로 방치되었다.


출처 위키피디아


시뇨리아 (현 베키오 궁전) 출처 위키피디아


파치 가문 일족은 피렌체에서 추방당했고,

그들의 재산은 모두 몰수 당했다.

또 파치 가문의 명칭과 문장들은 영구적으로

사용금지 조치를 당했으며 가문 이름도

공공장소에서 지워졌다.


이 음모사건을 묵인했던 교황 식스토 4세는

살비아티 대주교를 살해했다는 이유로

로렌초와 피렌체 시 전체를 파문하였다.


이에 피렌체 시민들은 교황과의 전쟁도 불사하였다.

나폴리와 동맹을 맺은 교황과의 전투가 2년 간

이어지자 피렌체는 절망적인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자 로렌초는 목숨을 건 필사적인

외교전을 시도했다.


피렌체를 포위한 나폴리 군대를 뚫고 단신으로

나폴리 왕을 만나러 간 것이다. 혼자서 적진으로

들어간 로렌초는 나폴리 궁에 3개월 간 갇혀

지냈다. 그동안 로렌초는 나폴리왕을 끈질기게

설득하였다. 이탈리아 국가들의 싸움은 프랑스,

스페인, 신성로마제국 등 강대국의 개입을

야기한다는 설득에 나폴리 왕은 마침내

로렌초를 지지하게 되었다.


나폴리왕이 돌아서자 교황은 어쩔 수 없이

겉으로나마 로렌초와 화해하여 사건은

일단락 되었다.


파치가의 음모 사건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피렌체에 메디치의 적은 모두 사라졌고

메디치는 권력을 더욱 강화 할 수 있었다.

이후 로렌초 데 메디치가 죽을 때 까지

피렌체는 르네상스의 절정기를 누렸다.


그는 동생 줄리아노의 원수를 갚기 위해 10년 간

끈질기게 노력하였는데 암살의 주모자이면서

생존해 있었던 리아리오를 1488년 암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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