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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시온 Apr 06. 2021

자산어보

영화를 보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영화 자산어보를 보았다.

자극적이고, 인공 감미료로 맛을 낸 음식을 먹다가

무공해의 자연식을 먹었을 때, 몸과 마음이 정화되는

듯 한 그런 느낌이었다. 밋밋하고 심심한 것 같지만

온 몸 깊숙히 스며들어 치유하는 것 같은 그런 느낌.

흑백 영화여서 더욱 그러했던 것 같다.





내가 이준익 감독의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사극을 표방한 여느 다른 영화와는 달리,

역사적 사실에 충실하려고 노력하는 진지함

때문이다. 또 주목하지 않았던 주변 인물을

부각하여 호기심을 일으키고, 나의 부족한

상상력을 채워주어 내 지식에 생기를 불어

넣어 주기 때문이다.




영화의 서두에서 "이 영화는 자산어보의

서문을 기반으로 한 창작"이라는 자막이 나온다.




자산 (玆山)은 흑산(黑山)이다.

나는 흑산에 유배되어 있어서

흑산이란 이름이 무서웠다.

집안 사람들의 편지에는

흑산을 번번히 자산이라 쓰고 있었다.

자(玆)는 흑(黑)자와 같다.


............. 섬 안에 장덕순 즉 창대라는 사람이

있었다. 두문불출하고 손을 거절하면서까지

열심히 고서를 탐독하고 있었다.

다만 집안이 가난하여 책이 많지

못하였으므로 손에서 책을 놓은 적이

없었건만 보고 듣는 것은 넓지가 못했다.

허나 성격이 조용하고 정밀하여,

대체로 초목과 어조 가운데 들리는

것과 보이는 것을 모두 세밀하게 관찰하고

깊이 생각하여 그 성질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의 말은 믿을 만 했다.

나는 드디어 이 분을 맞아

함께 묵으면서 물고기의 연구를 계속했다.


정약전의 자산어보 서문 - 흑산도의 물고기들 (정문기 옮김)



짧은 "서문을 기반으로 한 창작"이라 했음에도,

영화에는 여러 실존 인물들과

사건들이 등장한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정조 말기에서 순조 시기이다.

정약전은 동생 정약용과 함께 벼슬길에 올라

정조의 총애를 받았지만, 서학과 연루 되었다는

이유로 정적들로 부터 끊임없는 공격을 당했다.


1800년, 자신을 비호해 주던 정조가 서거하신 후,

어린 순조가 즉위하자, 영조의 계비이자 노론의

영수인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1801년, 대대적인 천주교 박해인 신유박해가 있었고

수많은 천주교도들이 죽음을 맞거나 유배되었다.




이때, 신앙을 고수하였던 정약종은 사형을 당했고,

정약전은 신지도로, 정약용은 장기로 유배당했다.


이듬해에는 정약전의 조카사위인 황사영

천주교 박해를 청나라에 알리고 군사를 청하는

글을 보내려다 발각되었다. 이 일로 형제는 다시

조사를 받았다. 다행히 혐의는 벗을 수 있었으나,

정약전은 흑산도로, 정약용은 강진으로 유배길을

떠나야 했다. 이후, 형제는 다시 만나지 못했는데,

서신을 주고 받으면서 그리움을 전하고 각자의

연구에 대해 논했다. 영화 속에 인용된 서신의

내용에는 형제간의 애틋함이 절절하여 다시

읽으며 음미해 보고 싶었다.


정약전은 권철신의 제자였다.

권철신은 성호 이익의 문하였고, 신유박해 때

처형되었다. 그리고 매부인 이승훈은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세례교인이었다. 이렇듯 일찌감치

서학과 실학을 접한 정약전은 누구보다도 성리학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고 사물의 명징함을

탐구하려는 욕구를 갖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흑산도에서 사물을 세밀히 관찰하는

장창대라는 청년을 만난다. 창대의 도움으로 정약전은

우리나라 최초의 해양생물학서적

자산어보를 만들었다. 장창대는 평범한

어촌민이었기에, 주목받지 못했다.

영화를 통해 지금이나마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 된다면 다행한 일이다.


흑산도에는 장창대의 묘가 아직 있다.

장창대의 후손이 그에 대해 언급한 내용을 

책에서 발견하였다. 서로 가르치고 배움으로서 

깊이 교감하였던 정약전과 장창대 간의 

정(情)이 얼마나 깊었는지 느껴져 인상깊었다.




"우리 5대조 어르신의 사촌이 문장이었다 그래.

......젊었을 적에 공부를 겁나게 했다고 그라더만.

사서삼경을 잠 안 자고 보면 담날

다 외운다는 말이 있잖어.

그런데 나중에는 뭔 일인지

편지도 남의 손으로 빌려 썼다고 그라제."


장창대로 추정되는 인물이 젊어서 뛰어난 

재능을 가졌는데 나이가 들어서는 무슨 

이유에선지 학문을 그만두어버렸다는 것이다.

갑작스런 정약전의 죽음이 심경의

변화를 불러온 것은 아닐까?


현산어보를 찾아서 5권 292쪽 이태원 지음








또 새로이 알게 된 인물은 문순득이다.

그는 우이도에 살면서 홍어를 거래했던

어물 장수였다. 그는 24살 때인 1801년

태사도에 갔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하여

류쿠국 (지금의 오키나와)에 표착했다.

8개월동안 그곳에서 생활하는 동안

류큐어를 배웠고, 중국으로 가는 류쿠국의

조공선에 탑승해서 조선으로 돌아오려 했다.

그러나 중국으로 가는 길에 또 풍랑을 만나

다시 필리핀 남쪽의 섬인 루손섬에 표착하여

필리핀어를 배웠다. 결국 난징과 베이징을 거쳐

1805년에 고향인 우이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는 홍어를 거래하기 위해 흑산도에 들렀는데

이때 정약전을 만나 자신의 경험을 들려주게 되었다.


정약전은 그의 체험담을 날짜별로 기록하여

표해시말이라는 책을 썼다. 그는 정약전과

우정을 나누며 가족처럼 모셨고 정약전이

우이도에서 사망했을 때 극진하게 장례를 치러

주었다고 한다. (우이도는 소흑산도로 불리기도 한다.)




배우들의 명연기는 자칫 심심하게 느껴질 영화를

맛깔나게 하였는데, 특히 설경구 배우의

얼굴, 말투, 연기는 조선 선비가 그대로 살아

나온 듯 자연스러워 가장 인상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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