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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시온 Apr 18. 2021

더 파더

영화를 보고


치매 노인에 관한 영화 더 파더를 보았다.

무척 혼란 스러워 공포감을 느꼈다.

치매가 혼란과 공포 그 자체라는 것을 ,

치매 노인의 입장에서 느끼게해 준다는 점에서

여느 치매영화와는 차별성이 있다.




요즘 나는 늘상 쓰던 단어가 무척 생소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래서 그 단어의 정의를

다시 생각해 보고 쓰임새에 맞게 쓰려고 하다보니

글 쓰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다.

이것이 치매의 전조가 아닐까 겁이 나기도

하지만, 애써 그건 쓸데 없는 걱정이야, 아직은

괜찮아, 다른 사람들도 그럴거야 하고 넘긴다.

그러면서도 치매예방에 관한 책을 보고, 치매를

다룬 영화에 관심을 두는 것을 보면,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병은 치매이기 때문인 것 같다.


이 영화는 기억이 단절되어 파편화 된

노인에게 감정이입이 되는 경험을 하게 한다.

조각나 버린 기억들이 뒤죽박죽이 되고,

익숙했던 방안의 사물들이 생소한 것들이

되었을 때의 혼란함.

혼자서도 내 집에서 잘 지낼 수 있는데

딸은 자꾸 간병인을 들인다.


간병인은 손목시계를 훔쳐간다.

처음 보는 낯선 남자가 거실에 앉아서

이 집은 이미 오래전 부터 자신의 집이라한다.

작은 딸과 대화를 나누었다.

파리로 떠난다고 해서 그곳 사람들은 영어를

못한다고 말렸다 등 등...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노인의 망상이다.

간병인은 손목시계를 훔쳐간적이 없고

처음 보는 남자는 자신의 사위이며

그 집은 사위의 집이었다.

작은 딸은 이미 이 세상을 떠난 사람이다.





안소니 홉킨스의 혼란스러운 표정,

손목시계에 집착하는 모습, 이미 죽은 사람이

나타나는 망상은 100세를 두 달 앞두고 돌아가신

내 엄마의 모습과 오버랩되었다.


부엌 살림살이에 집착하던 엄마.

값나가는 물건도 아닌, 하찮은 김치 버무리던

다라이가 엄마에게는 그렇게도 애착이 가는

물건이었던가. 엄마를 모시던 오라버니는

새벽 2-3시에 다라이를 찾느라 집안을 뒤지던

힘없는 엄마가 다칠까봐, 밤을 지새곤 했다.

또 돌아가신 친척들이 어제 왔었다고도 하셨다.


그때는 엄마가 정신을 놓으셔서,

치매이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면서 그 상태의

엄마는 공포스러웠을 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건이 자꾸 없어지고 낯선 사람들이 드나든다.

(자식이나 손자를 알아보지 못하는 엄마에게

그들은 모두 낯선 사람들이 아니겠는가.)




요양 병원에서  안소니 홉킨스는

"엄마"를 찾으며 울부짖는다. 소년이 되어버린 것일까?

그 연기는 얼마나 리얼한지 울컥 눈물이 솟았다.

그러고 보니 나의 엄마도 임종이 가까운 시기엔

소녀시절의 기억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남편과 자식이 아니라

당신의 엄마와 동생의 이름을 불렀으니까.


세상과 헤어지는 과정과도 같은 치매는

모두에게 얼마나 지리하고 고통스러운지.

느닷없이, 잠자다가, 혹은 몇 일만 앓고,

제 정신을 붙잡고 숨을 거두는 것은 얼마나

큰 행복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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