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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들에게 13

단순하고 고요한 삶

by 신시온


태양열이 안양천변을 달구어, 습하고 더운 바람이

훅 훅 밀려드는 계절이 왔어. 초록의 잎사귀는

더욱 짙푸르게 싱싱한 향기를 내뿜는구나.

작년 이맘때, 이 계절을 한 번 더 보고싶다고

생각했고 그렇기에 항암치료를 중단해야겠다고

결심을 굳혀가던 기억이 나는구나.


치료를 중단하면 암세포가 급격히 퍼져갈거라고

경고하던 의사의 말은, 내 결심이 느슨해 질 때마다

경고등 처럼 깜빡 깜빡 생각나곤 했지.

그동안 내가 정한 원칙대로 음식을 취하고,

매일 햇볕과 바람을 쐬며 1시간 이상을 걸었어.

눈, 비가 와도 우산을 쓰고 걸었지

그리고 너무나 고맙게도, 학생들이 다시 나를

찾아와서 역사를 가르치는 일을 또 할 수 있게

되었어. 학생들을 대면하고 있는 시간은

나의 하루 중 가장 생동감있는 시간이야.

그렇게 하루 하루를 지내다 보니

벌써 거의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갔구나.


이제 식이요법은 특별히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도 되는 취향이 되었어. 처음엔

외식을 하고 싶어도 갈 수 있는 식당이 없고

걷기 운동 후, 갈증을 달래줄 수 있는 음료를

사 마실 수도 없고, 입이 심심할 때 씹을 수

있는 과자를 살 수도 없고,

가끔씩 먹으면 기분 좋아지는 달콤하고

폭신한 케잌류도 먹을 수 없다는 것이 답답했었어.



그런데 어느 순간, 자유로움이 느껴졌단다.

자본주의의 촘촘한 그물에서 빠져 나온 것

같은 그런 해방감 같은 것이었어.

그동안 하지 않아도 될 일들을 습관처럼

하면서 돈과 시간을 낭비해 왔고, 먹지 않아도

될 음식을 먹으며 뱃 속을 불편하게 했고,

갖기 어려운 것을 갖고 싶어하면서 마음을

불편하게 해 왔다는 것을 알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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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유한하다는 것은 누구나 다 잘 알고 있지.

그런데 지금 내게 삶의 유한성은 보다 구체적이

되어서 종착역이 어렴풋이 보이는 지점에

있는 것 같아. 그 느낌은 연극이 끝난 뒤

조명이 스러지는 무대 위에서 텅빈 객석을

바라보고 있는 느낌과 유사할 것 같아.

적막하지만 관객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어서 자유롭고,

나 자신에게만 충실하면 되겠기에 홀가분한

그런 기분이지.



많은 것들이 무의미해졌고

따라서 많은 욕구가 사라졌어.

여행을 가고 싶다거나

맛있는 음식을 사먹으러 가고 싶다거나,

무슨 옷이나 물건을 사고 싶다거나 하는

욕구도 눈에 띄게 줄었어.

욕구란 내 주변을 둘러싼 환경이 강요한

것이더구나. 이젠 그런 유혹에 흔들리지

않아 평온함을 누리고 있어.


워낙이 나의 사회관계망은 단촐했지만,

지금은 더욱더 단촐해졌어. 같은 관심사를

갖고 있어서 대화거리가 많고, 자기주장을

강하게 하기 보단, 경청하는 태도를 갖고

있는 친구와 만나면 함께 토닥이며

길을 걸어가는 느낌이라 참 편하더구나.


그러한 만남만을 남겨둘 수 있는

지금 60대는 참 좋은 나이인 것 같다.

지극히 단순하고 고요한 삶을 누릴 수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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