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리뷰
아주 오래전에 보았던 영화인데
넷플릭스에 나왔길래 다시 보았습니다.
나이가 든 다음에 보아서인지
전보다 훨씬 더 깊이 이해하고 공감했습니다.
이 영화는 달링턴 경의 저택에서 집사로 일하는
스티븐스 (안소니 홉킨스)와 집사보조로 들어온
켄턴 (엠마 톰슨)이 중심 축입니다.
그런데 저는 집사인 스티븐스와 저택 주인
달링턴 경의 성격과 삶에 관심이 갔습니다.
영화는 달링턴 경의 저택을 경매하는
장면에서 시작합니다.
달링턴 경은 생전에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의 주요 정계 인물들을 초대하여 연회를 베풀고,
국제 회의의 장소로 자신의 저택을 제공했습니다.
유럽의 평화를 위해 나름대로 노력을 했던 것이죠.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고 달링턴 경은
히틀러와 거래했다는 혐의를 받습니다.
그는 자신을 독일에 협조한 매국노로 지목한
신문사를 상대로 고소를 했는데 패소하고
명예가 추락했습니다. 실의에 잠긴 달링턴 경은
화려했던 과거를 뒤로하고 찾는 사람 하나 없이
외롭게 살다가 사망했습니다.
그의 상속인들은 저택을 경매에 내 놓았는데,
미국의 부호가 저택을 사들임으로서
주인공스티븐스 (안소니 홉킨스)는
다시 새 주인의 집사로서 일을 하게 됩니다.
달링턴 경은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맺어진
베르사유조약이 독일에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하고
도와주려고 했습니다. 그 이유를 집사 스티븐스에게
설명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독일인 친구가 있었는데 전쟁 중에 적으로써 만나
싸웠답니다. 전쟁이 끝나면 만나기로 했는데
베르사유 조약으로 이루어지지 못했답니다.
독일인 친구는 재산을 잃고 직장도 못구해
자살을 했지요. 그래서 독일을 도와야 할 의무감을
느낀다는 것이었어요.
선량한 성품의 평화주의자였지요.
그는 프랑스의 달라디에 수상과 나치를 초대하여
협력하도록 설득을 하지만 나치의 관심은
그의 저택에 있는 예술품들이었습니다.
나치는 그를 이용하고 있었던 것이죠.
달링턴 경은 자신이 평화를 위해 일한다고
믿었지만, 냉혹한 정치적 현실 속에서는
어설프고 순진한 평화주의자였을 뿐 입니다.
사람들은 늘 자신의 경험과 자신의 도덕적 잣대로
타인을 판단합니다. 그리고 세상엔 나와 다른
많은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달링텅 경은 선의를 가진 고귀한 성품의
평화주의자로서 어쩌면 모든 사람들이 자신과
비슷할 거라고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그는 선량한 인물이 시대적 통찰력과 다양한
인간성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지 않았을 때
어떻게 이용당하고 희생물이 되는지
느끼게 해 주었던 인물입니다.
사실 자기가 속해 있는 시대에서 올바른
통찰력을 갖기는 어렵습니다. 세월이 지나
역사가 정리되고 해석된 이후에는 무엇이
옳았고 무엇이 그른것인지 알 수 있지만요.
그래도 최소한 노력은 해야겠지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악의 무리를 도와주게 되는 결과를 낳지 않도록.
그리고 이용당하지 않도록.
주인공 스티븐스 (안소니 홉킨스)는
자신의 직무에 완벽한 사람입니다.
너무도 완벽하여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지 않고 , 사적인 중요한 일이 있어도
늘 자신의 직무가 우선입니다.
아버지의 임종도 켄턴 (엠마 톰슨)에게 맡깁니다.
중요한 연회를 실수없이 치르는 것이 우선이니까요.
캔턴양을 사랑하게 되었지만 단 한번도
표현 하지 못합니다. 캔턴양이 독서중인
스티븐스의 방에 찾아와 무슨 책을 읽느냐며
장난기 있게 그 책을 뺏으려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스티븐스는 책을 뺏으려는 캔턴양을 숨이
멎을 듯한 눈빛으로 바라봅니다.
그녀가 "이건 오래된 사랑이야기잖아요"
라고 하는데, 그는 마치 이성을 찾은 듯, 대답합니다.
"난 어떤 책이든 어학수준을 높이기 위해
책을 읽습니다"라고.
스티븐스의 아버지도 집사였습니다. 그는 노쇠하여
몸의 중심을 잘 잡지 못해 넘어졌는데도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안전하게 쟁반을
나르는 연습을 했습니다.
스티븐스는 직무 이외의 것에 자신을 절대 드러내지
않습니다. 집에 온 정치가가 스티븐스에게 정치
외교에 관한 견해를 묻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는" 아는바가 없습니다,"
" 제가 관여할 바가 아닙니다."
" 도움이 되지 못해 죄송합니다" 라는 말로
대답을 회피합니다.
그는 직무이외의 것에 관여하고 싶지 않았고
오직 주인에게 충직한 집사였을 뿐이죠.
대답을 회피하는 스티븐스가 돌아서자 정치가는
일행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저렇게 아는바가 없고 견해가 없는 사람에게
투표권을 준다는 것은 어린아이에게 칼을
맡기는 꼴이야"라고.
달링턴 경이 죽고, 미국인 새 주인이 휴가를 줍니다.
마침 결혼을 하기 위해 저택을 떠났던 캔턴양이
보낸 편지를 받은 터였습니다. 편지 내용은
캔턴양이 저택시절을 가장 행복했던 때라고 회상하며,
이혼을 했으니 다시 일을 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스티븐스는 캔턴양을 만나기 위해 길을 떠납니다.
가는 길에 만난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스티븐스는
당황스런 입장에 처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인에 대한 반감이
고조된 상황에서 정치적 견해가 무엇인지
추궁당하는 상황이었거든요.
매국노로 낙인 찍힌 달링턴 경과 가까웠고 ,
많은 정치인들을 만났다는 이유때문이었죠.
그는 얼버무리며 그 자리를 회피하지만
결국 다음날, 자신을 태워다 준 사람에게
달링턴 경의 집사였음을 고백합니다.
스티븐스와 그의 아버지를 보고
우리나라의 6 -70년대를 살아온
세대를 떠올렸습니다.
생존을 위해 치열하게 살아온 사람들이죠.
개인적인 감정이나 사적인 가정생활을 뒤로
하고 오직 직무에 충실하고 상사에 충직하게
살아왔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성실함이 바탕이 되어 우리나라는 번영을
맞이하게 되었으나 그들은 시대흐름에 맞는
가치기준을 정립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격변하는 이 시대에 당황스럽고
때로는 분노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들은 감정표현도 서투릅니다. 사랑한다, 슬프다,
보고싶다라는 표현도 잘 못합니다.
그런 세대의 자식으로 성장한 나도
그런 감정표현을 잘 못합니다.
이 세상 누구 보다도 자식을 사랑하지만
나의 딸들에게 사랑한다는 표현이 잘 나오지
않습니다. 그 말이 내 마음을 다 담고 있는지도
모르겠고요.
영화에서 오래 묵은 두사람의 사랑은
결실을 맺지 못합니다. 캔턴양은 딸이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남편은 자신을 애타게 필요로 하지요.
캔턴양은 자신이 해야하는 일을 하기 위해
다시 떠납니다. 곧 태어날 손자를 돌보아야 하는 일,
그리고 자신을 필요로 하는 남편 곁으로요.
스티븐스도 새 주인을 모시는 집사일을
다시 시작하게 되지요.
지나온 삶에서 선택하지 못했던 많은 것들은
영화 속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비둘기 처럼
창 밖으로 날아갔습니다. 어쩌면 삶을
더 윤택하고 행복으로 충만한 삶으로
만들어주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죠.
스티븐스와 캔턴양에게 남아있는 나날들은
해야하는 일을 계속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남아 있는 나날들은 스티븐스와
캔턴양과는 다르게 만들어 갈 수 있을 까요?
내가 해야만하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면서 남아있는 나날들을 지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