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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시온 Aug 28. 2020

노르만 정복

영어에 프랑스어가 많은 이유


9세기에 바이킹은 유럽의 곳곳을 침략하였는데

잉글랜드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어떤 왕들은 바이킹의 침략을 잘 막아냈지만

바이킹은 물러갔다가도 또 다른 무리가

쳐들어오곤 했지요. 그러다가 바이킹 출신의

왕들이 잉글랜드를 통치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200여년을 지내다보니 바이킹은

자연스레 잉글랜드인들과 결혼도 하고

섞여 살게 되어 바이킹과 앵글로 색슨족간의

구분이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11세기에 이르러 또 다른 침략이 있었습니다.

프랑스에 있는 노르망디의 공작 윌리엄이

잉글랜드를 정복하여 왕이 됩니다.

이 전투를 헤이스팅스 전투 라고 합니다 (1066)


노르망디는 911년 프랑스의 샤를 3세가

 바이킹에게 준 땅입니다. 

바이킹을 노르만 족이라 했으므로

이 땅의 이름을 노르망디라 칭했습니다.


노르망디 출처 Pixel


바이킹이 프랑스 왕으로 부터 봉토를

하사받고 프랑스 왕의 신하가 된 것이지요.

차차 그들은 프랑스화 되어 프랑스어를

사용하게 되었어요.


100여년이 지난 후 바이킹의 후손이자

노르망디의 영주였던 윌리엄 (프랑스어로는 기욤)은

잉글랜드의 왕위가 자신에게 주어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어요.


당시 잉글랜드에서는 참회왕 에드워드가

20여년간 왕위에 있었는데 아들을 낳지 못하자

신하들이 해럴드라는 귀족을 왕위에 앉히기로

했습니다. 참회왕 에드워드도 동의를 했구요.


그런데 노르망디의 윌리엄은 잉글랜드 왕가와

친척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잉글랜드의 신하들은 노르망디 출신의 왕을

원하지 않았으므로 반대했지요.


출처 구글지도



그러던 중 해럴드가 항해하다가

폭풍에 떠밀려 노르망디 해안에

표류해 왔습니다.


노르망디의 윌리엄은 해럴드를 구출해 주고

잉글랜드의 왕위를 포기할 것과 자신의 신하가

될 것을 맹세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적에게 둘러싸인 공포분위기에서, 해럴드는

마지 못해 맹세를 하고 잉글랜드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몇 년 뒤, 참회왕 에드워드가 죽자

해럴드는 맹세를 지키지 않고 

잉글랜드의 왕위에 올랐습니다.


이에 화가난 노르망디의 윌리엄은 당장 군대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 헤이스팅스에 도착했습니다.


해럴드의 군대는 북쪽에서 내려온 노르웨이

군대와 전투를 치른 다음이라,  병력이 부족하고

지친 상태였습니다. 불행하게도 해럴드는

윌리엄과의 전투중에 죽고 말았습니다.


해럴드의 묘지 비석에는 ' 불행한 해럴드

Horold the Unfortunate' 라고 씌여 졌고

승리한 윌리엄에게는 '정복왕 윌리엄

William the Conqueror'이라는 별명이

붙여졌습니다.


헤이스팅스를 묘사한 타피스트리 출처 위키피디아



정복왕 윌리엄은 자신의 부하들에게

봉토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로서 노르망디에서 온 사람들이 잉글랜드의

왕과 귀족이 되었죠. 그들은 프랑스어를

사용했으므로 프랑스어가 지배층의 언어가

되고 잉글리쉬는 피지배층이 쓰는 언어가 되었습니다.


윌리엄은 잉글랜드 전역의 인구와 토지를 조사하여

둠스데이북이라는 토지대장을 남겼습니다.

둠스데이북에 따르면 190여명에 이르는 남작 계급이

모두 노르만 출신이었으며 하급 기사들에게도

작은 단위로 토지가 지급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노르만 정복으로 많은 프랑스 어휘가 영어에

더해져서 영어의 표현이 풍부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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