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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시온 Sep 09. 2020

로마의 역사 7

줄리어스 시저 (율리어스 카이사르)


기원전 60년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연대한 1차 삼두정치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듬해 집정관이 된 카이사르는 여러가지 개혁을

추진하였는데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공유지를

재분배하는 농지법입니다. 이것은 100여년 전

그라쿠스 형제가 시행하려다 실패했던 개혁법이었죠.

원로원은 그의 입법을 강력하게 방해하였으나

폼페이우스의 군사력과 크라수스의 재력을

동원하여 민회에서 농지법을 가결하였습니다.

카이사르는 이렇게 원로원을 무시하고 

민회를 통해 입법을 하거나, 민회 마저도 

무시하면서 정책을 밀고 나갔습니다.


이 당시의 정치를 풍자하여 율리우스와

카이사르가 집정관이라는 소리가 나돌았답니다.


그가 집정관에서 물러난 기원전 58년,

원로원은 그를 로마에서 멀리 떠나보내기 위해

갈리아 총독으로 임명했습니다.

갈리아는 지금의 프랑스에 해당하는 지역입니다.


카이사르는 이 기회를 자신에게 부족한

군사적 업적을 쌓을 좋은 기회로 삼습니다.


그는 순식간에 군대를 장악하고 탁월한

리더쉽을 발휘했습니다. 그리하여 갈리아의

부족들을 라인강 너머로 몰아내었고 지금의

벨기에를 정복했으며, 영국 해협을 건너

브리타니아 (지금의 영국)까지 나아갔습니다.

브리타니아의 원주민들이 거세게 저항하여

정복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갈리아는 로마의

지배지역으로 확고히 하여 그의 인기는 더욱

높아졌습니다. 그는 이 시기의 경험을

"갈리아 전기"를 통해 전하고 있습니다.


1차 삼두정치는 크라수스의 죽음으로 끝이 납니다.

크라수스는 동방의 파르티아와의 전쟁에서

전사하였습니다. 카이사르의 공로와 그에 따른

인기는 원로원 의원들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원로원은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의 연결고리를 끊기 위해 폼페이우스에게

무제한의 대권을 부여한다는 법안을 가결합니다,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를 불복종과 대역죄 혐의로

고발하였으며 원로원은 카이사르에게 군대를

해산하고 로마로 귀환하도록 명령을 내립니다.


로마 법에 따르면 로마의 북부 경계선인

루비콘 강을 건널 때 군대를 거느린 채 개선하는

것은 금지되어있었습니다. 그것은 반역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기원전 49년 카이사르는

군대를 거느리고 루비콘 강을 건넙니다.

이 때, 그가 했다는 "주사위는 던져졌다"라는 말은

그가 그리스의 희곡작가 메난드로스의 작품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한 것이라 합니다.


카이사르의 결단으로 로마의 공화정은 최후를

맞이하게 되고 내전에 휩싸이게 됩니다.


폼페이우스는 이집트로 도주했다가 살해되었습니다.

폼페이우스를 쫓아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 간

카이사르는 이집트 남매들 간의 왕권 다툼에 개입하여

클레오파트라를 이집트의 지배자로 세우고 그녀와

함께 지내면서 아들까지 낳았습니다. 이후

나머지 반대파를 서서히 숙청했으며 로마의

유일한 지배자가 되었습니다.


기원전 47년 소아시아에서의 전쟁에 나가

손쉽게 승리한 후,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라는

간결한 문장으로 원로원에 승전 소식을 알립니다.


그 이듬해에 로마로 귀환하여 10년 임기의

독재관에 취임하였습니다.

그는 군대에 대한 충분한 보상을 함으로써

권력의 기반을 안정시키고, 로마 시민권을 크게

확대하여 전 로마 영토의 통합을 꾀하였습니다.

금과 은의 환산율을 고정화 하고 이자율의 상한선도

설정했습니다. 해방노예에게 공직을 개방하는 등

많은 개혁법을 실시했습니다.


새로운 달력을 고안하여

1년을 12개월, 365일로 하고 윤년마다 2월을

29일로 하는 방식을 채택했습니다.

이 달력을율리우스력이라 합니다.

율리우스력은 이후, 1600여년 동안 사용됩니다.

현대의 달력은1582년 율리우스력을 좀더 정확하게

다듬은 그레고리력입니다


이즈음 원로원의 의원수는 900명으로 증대했는데

대부분 카이사르가 임명했으므로 원로원은

유명무실한 존재로 전락했습니다.


독재자에 대한 두려움과 공화정에 대한 꿈을

간직한 몇몇 의원들은 그를 죽이기로 작정했습니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종신 독재관에 오른지

두 달만에 카이사르는 원로원에서 암살당했습니다.

암살을 주도한 의원 중에는 카이사르가 특별히

총애했던 브루투스도 있었습니다.


카이사르의 죽음 출처 픽사베이


카이사르가 죽으면 공화정이 회복 될 줄 알았지만

상황은 그렇게 전개되지 않았습니다.

카이사르를 열렬히 지지했던 로마의 중하류층 사람들

그리고 카이사르와 수많은 전쟁을 치른 군인들은

소수의 특권층인 귀족들이 카이사르를 죽인것에

분노하였습니다.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한

암살자들은 도주하였고 브루투스는 결국

자살로 생을 마쳤습니다.


카이사르에게 충성을 바치던 부관 안토니우스

카이사르의 기병대장 레피두스와 손을 잡고,

혼란을 수습하려 했습니다.


여기에 옥타비아누스가 끼어듭니다.


옥타비아누스 출처 픽사베이


카이사르가 남긴 유언장에는 자신의 누이의

외손자인 옥타비아누스를 양자로 삼아 유산을

물려주겠다는 내용이 있었거든요. 

옥타비아누스는 열 아홉살의 어린나이였지만 

카이사르의 상속자로서 카이사르라는 이름을 물려받게 

되었고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카이사르 사후, 안토니우스, 레피두스,

옥타비아누스가 주도하는 2차 3두정치의

시대가 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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