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시온 Sep 24. 2020

콘스탄티누스 황제

로마와 크리스트교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밀라노칙령(313)을 통해

로마제국에 크리스트교를 공인한 황제입니다.

이후 크리스트교는 유럽인 전체가 믿는 

종교가 되었으니 그를 흔히 

콘스탄티누스 대제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 출처 픽사베이



콘스탄티누스가 태어나기 전, 아버지 콘스탄티우스는

로마의 장군이었습니다. 어느날 여관에 들었는데

여관 주인의 딸인 헬레나에게 반했습니다.


열렬한 구애 끝에 결혼을 하고 아들 콘스탄티누스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헬레나의 신분이 낮았기

때문에 정실부인이 될 수는 없었고 첩이되었지요.


그러던 어느날, 막시미아누스 황제가 콘스탄티우스

장군을 보고 사윗감으로 점찍고 출세를 약속하며 

첩 헬레나와 헤어지라고 요구했습니다.

콘스탄티우스는 황제의 사위가 되기 위해 헬레나를

버렸고, 부황제 자리에 올랐습니다.


당시 로마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에 의해 4분할

통치가 되던 시기였습니다. 콘스탄티우스는

서방의 부황제가 되었던 것이지요.

그는 아들인 콘스탄티누스를 동방의 황제인

디오클레티아누스에게 인질로 보내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황제의 명에 따라 전쟁에 나가

많은 승리를 거두었으며 군사들 사이에서 명망있는

장군으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죽자, 콘스탄티누스를 지지했던 군대는

그를 서방의 황제로 지지했습니다. 그러나

서방에는 이미 막센티우스가 황제로 임명되었기에

둘의 충돌은 불가피했습니다. 알프스 산맥을 넘어

밀비우스라는 다리 근처에 진을 친 콘스탄티누스는

숫적으로 열세였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콘스탄티누스는 꿈 속에서 어떤 표지를 보았고,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 표지를 군대의 표지로 삼아

싸우면 이길것이라는 음성이었습니다.

그는 꿈속에서 본 표지를 무기와 방패등에

그려넣으라고 했는데 이 표지를 라바룸이라고 합니다.


라바룸 출처 픽사베이


표지 속의 글자 X와 P는 그리스어로 크리스트를

상징합니다. 콘스탄티누스는 이 밀비우스 다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동방의 황제도 내쫓고

유일한 황제로 등극했습니다.


그리고 313년 밀라노 칙령을 통해 더 이상

로마에는 크리스트교에 대한 박해가 없을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는 크리스트교가 박해를 받을 때

빼앗긴 재산도 다시 돌려주었고, 성직자의 세금을

면제해주었습니다. 또 성당을 지을 수 있도록 자금을

대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에 지어진 가장 큰 성당이

성베드로 성당입니다. 그는 다른 종교에 대해서도

관용을 베풀었습니다. 크리스트교가 로마의 국교로

선포되는 것은 한참 뒤인 테오도시우스 황제 때 입니다.


콘스탄티누스는 수도를 로마에서 비잔티움으로

옮기고 자신의 이름을 따서 콘스탄티노폴리스라고

칭했습니다. 이곳은 지금의 터키 이스탄불입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콘스탄티누스가 바닥에

창을 대고 끌고 가면서 선들을 그렸고 그 선에 따라

성벽을 설치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는 새로운 로마를

세우려고 한 것입니다.


그는 가정적으로 매우 불행한 일을 겪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과 새로 맞이한 젊은 부인이

간통하는 모습을 목격하고 둘 다 처형을 한 것이죠.

독실한 크리스트교 신자였던 어머니 헬레나는

아들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가기를

소원하였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호위부대를

동원해 어머니가 예루살렘을 순례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예루살렘에 도착한 헬레나는 예수의 무덤이었을거라 

짐작이 되는 곳을 발굴을 했습니다.

그곳에서 십자가와 다양한 유물을 발견했고

콘스탄티누스는 어머니의 소원에 따라 그곳에

성당을 세웠는데 성묘교회라 불립니다.


예루살렘의 성묘교회 출처 픽사베이



크리스트교의 역사가 수백 년에 이르고, 박해가

사라지자 여러 종파가 생기고 서로 대립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예수의 존재에

대해 아리우스파와 아타나시우스파가

첨예하게 대립하였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분란을 종식시키기 위해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했습니다.


니케아 공의회 출처 위키미디어


아리우스의 주장은 신이 구원을 위해 예수를

창조했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이에 따르면

예수는 신격을 유지하지 못할 뿐더러

이 주장은 유대교의 주장과 별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이에 알렉산드리아의 주교인

아타나시우스는 아버지인 신 (성부)와 그 아들인

예수 (성자), 성령의 세 위격이 하나라는 삼위일체설을

주장하며 아리우스의 주장에 반격을 가했습니다.


한 달간의 격론 끝에 아타나시우스의 삼위일체론이

정통으로 인정되고 아리우스파는 이단으로

판정이 되어 추방되었습니다.


그러나 이후에도 오랫동안 두 파의 갈등이

완벽하게 마무리 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콘스탄티누스대제는 죽기 직전에 아리우스파에게서

세례를 받았다고 전해지고 있으니까요.








작가의 이전글 체인지 9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