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와 권력의 불멸

영화 The Island(2005)로 본 생명정치의 역설

by ShionJins
2025년 9월,
중국의 시진핑 주석이 “인간은 150세까지 살 수 있다”는
발언을 했다는 보도가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이 발언은 9월 3일 전승절 열병식 생중계에서 전 세계로 중계되었다. 장기집권을 이어온 지도자의 입에서 나온 ‘150세 인간’ 담론은, 단순한 건강 담론이 아니라 권력자의 생명에 대한 관심과 통제의 의지가 노출된 상징적 사건이었다.


6492_7314_2941.jpg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이 발언은 9월 3일 전승절 열병식 생중계에서 전 세계로 중계되었다.


이 발언은 생명공학의 낙관적 전망이라기보다, 권력의 지속과 생명에 대한 통제라는 오래된 정치적 욕망을 드러낸다. 역사적으로 권력자들은 늘 생명 연장의 담론을 통해 자신의 지배를 정당화해왔다. 고대의 신왕(神王) 개념에서부터 현대의 바이오테크놀로지까지, ‘장수’는 언제나 통치의 은유였다. 이러한 맥락을 가장 생생하게 드러내는 영화가 바로 마이클 베이 감독의 〈The Island〉(2005)다.


fantisland_wideweb__430x304.jpg <The Island(2005)>


이 영화에서 사람들은 오염된 외부 세상으로부터 보호받는 시설에서 살아가며, “선택된 자만이 떠나는 섬”을 꿈꾼다. 그러나 그들은 실제로 부유층의 장기 공급을 위해 만들어진 복제 인간(clones)이다. 그들이 꿈꾸던 ‘섬으로의 여정’은 구원이 아니라, 장기 적출의 순간이다.


이 서사는 푸코(Michel Foucault)가 말한 ‘생명정치(Biopolitics)’의 전형적인 은유로 읽을 수 있다.

푸코에 따르면 근대의 권력은 더 이상 죽음을 명령하는 권력이 아니라, “살게 함으로써 통제하는 권력”이다. 즉, 사람을 살리고 관리함으로써 지배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권력이 ‘누가 살고, 누가 죽어야 하는가’를 결정하기 시작할 때, 생명정치는 곧 배제의 정치로 변한다.


중국 공산당 체제의 권력 구조는 이와 같은 생명정치의 역설을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표면적으로는 “인민의 생명을 보호하고, 사회의 안정을 보장한다”고 말하지만, 그 생명은 개인의 권리가 아니라 체제 유지의 자원으로 취급된다. ‘반체제 인물’은 곧 ‘체제의 건강을 위협하는 세포’로 낙인찍히며, 그 제거는 국가 면역작용으로 정당화된다. 이 지점에서 로베르토 에스포지토(Roberto Esposito)가 말한 ‘면역정치(Immuno-politics)’ 개념이 작동한다.

20230601504233.jpg 로베르토 에스포지토(Roberto Esposito) : 『코무니타스』, 『임무니타스』, 『비오스』의 출판 이후 일련의 혁신적인 정치철학 저서들을 지속적으로 발표한 이탈리 정치철학자


국가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일부 생명을 희생시킬 권리를 스스로 부여하며, 그 행위를 ‘방어’로 포장한다. 결국 공산당 체제에서의 생명정치는 인민을 보호하는 장치가 아니라, 권력자의 생명을 연장하는 시스템으로 전도된다. 마오쩌둥의 불로장생 신화와 시진핑의 ‘150세 발언’은 시대를 달리하지만, 모두 “지도자의 생명 = 체제의 생명”이라는 동일한 논리를 따른다.


생명을 살리는 과학기술 담론은 체제의 영속성을 정당화하는 정치언어로 전환된다.〈The Island〉의 복제인간들이 ‘살게 하기 위해 길러진 존재’였다면, 권위주의 체제 속 인민 역시 ‘살게 하기 위해 통제받는 존재’로 전락한다. 살아 있다는 사실이 자유의 증거가 아니라, 복종의 증거가 되는 것이다.

푸코가 경고했듯, “살게 하는 권력은 죽이는 권력보다 더 정교하고 위험하다.”

그러나 영화의 결말은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남긴다

탈출에 성공한 주인공이 외친다 — “나는 복제가 아니라, 인간이다.”


이 한 문장은 단순한 자유 선언이 아니라, ‘인간은 체제의 부속물이 아니라는 존재론적 항변’으로 읽힌다.

그러나 이 선언은 모든 정치 체제에서 같은 의미를 갖지는 않는다. 특히 공산당 체제에서 인간은 독립적 주체가 아니라, ‘국가와 당의 역사적 사명을 완성하기 위한 집합적 존재’로 이해된다.


마르크스적 인간관에서 인간은 본질적으로 사회적 존재이며, 개인은 공동체 속에서만 완전한 존재로 실현된다고 본다. 이런 사상은 20세기 들어 국가주의와 결합하면서, “개인의 자유보다 집단의 생존이 우선한다”는 이념적 정합성으로 전환되었다. 결과적으로 ‘국가를 위해 만들어진 인간’이라는 전제가 체제 정당성의 근간이 되었다. 따라서 “국가는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인권적 명제는 공산체제의 철학적 문법 안에서는 “국가는 인민 전체의 역사적 목적을 위해 존재하며, 개인은 그 목적을 수행하는 세포다”로 번역된다.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적 인권담론과 공산주의적 공동체 담론의 본질적 간극이다.


푸코가 말한 생명정치가 “삶을 관리하는 권력”이라면, 공산당 체제의 생명정치는 “역사를 관리하는 권력”이다. 즉, 개인의 생명은 국가의 생명 속에서만 의미를 갖는다.그렇기에 반체제 인물은 단순한 이탈자가 아니라, 국가의 생명 질서를 교란시키는 면역학적 위협 요소로 간주된다. 이 논리가 “국가를 위해 인간이 존재한다”는 신념을 더욱 강화한다. 결국 이 체제에서는 인간의 존엄이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 집단적 존엄으로 대체된다. 개인은 사라지지 않지만, 언제나 집단의 그림자 속에서만 존재를 허락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The Island〉의 주인공이 외친 “나는 인간이다”라는 선언은, 공산체제의 문법에서는 ‘개인의 반역’이 아니라, “집단의 질서로부터의 탈주”로 읽히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국가의 목적을 위해 존재한다면,
그 국가는 누구의 생명을 연장하려 하는가?”

오늘날 우리는 의학과 기술의 발전으로 “장수의 시대”를 맞이했다. 하지만 생명을 연장하는 기술이 인간의 존엄보다 앞설 때, 그 수명은 축복이 아니라 권력의 감시가 길어진 시간이 된다. 불멸을 꿈꾸는 권력은 인간의 유한함을 망각하게 만들지만, 바로 그 유한함을 자각하는 순간에만 인간은 존엄해진다.


진정한 생명정치는 생명을 통제하는 체제가 아니라,

모든 생명이 자유롭게 살아갈 권리를 인정하는 사회적 윤리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것이 21세기의 ‘150세 발언’보다 훨씬 오래 살아남을, 진짜 인간의 선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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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어쩌면 꽤 이상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일본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며, 극단적인 입장보다는 중용과 관조의 태도로 세상을 바라보는 데 익숙해졌습니다. 늘 ‘좋다’ 혹은 ‘싫다’로 나누기보다는, 사물과 사람의 여러 면을 함께 보려 노력해왔습니다.

하지만 근래에 좋아하던 중국의 한 연예인의 죽음을 접하며, 저는 다시금 ‘인간의 생명과 존엄’, 그리고 ‘공산체계’와 ‘사회주의’가 인간에게 무엇을 요구하는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 글은 그런 사적인 사유의 연장에서 나온, 작은 기록에 불과합니다.


그냥,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구나 — 그렇게 가볍게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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