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은 존재하는가

죽음과 통제된 희망

by ShionJins

“희망은 존재하는가?”

쇼펜하우어, 니체, 시오랑, 카뮈, 아도르노, 슈펭글러—

그들은 하나같이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희망은 고통의 연장이며, 인간이 절망을 견디기 위해 만든 허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카프카는 한 문장으로 이 비관의 연쇄를 끊었다.


희망은 있다.
다만 그것은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다.


이 문장은 오늘날 중국 배우 위멍롱(于朦胧(于朦朧, Yu Menglong), 1988.06.15.-20205.09.11.)의 죽음 이후 벌어진 현실에 놀랍도록 닮아 있다.


그의 갑작스러운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팬들은 진실을 요구하며 온라인으로 모였다.

하지만 그들의 움직임은 오래가지 못했다.

웨이보는 관련 게시물 10만 건을 삭제하고,

수천 개의 계정을 폐쇄했으며,

그의 이름이 들어간 해시태그는 더 이상 검색되지 않는다.

심지어 그가 소속된 공작실 계정은 이미 몇 달 전 폐쇄된 법인 명의로 드러나, 공식 발표조차 의문에 휩싸였다.

진실을 묻는 목소리 대신, 체제가 승인한 ‘희망의 서사’만 남았다.


중국 사회에서 희망은 늘 국가의 언어로 말해진다.

“발전”, “안정”, “단결” — 그 말들은 집단의 미래를 약속하지만, 개인의 절망을 지운다.

권력은 희망을 통제의 장치로 사용하며,

시민의 불안을 “혼란의 조장”으로 낙인찍는다.

결국, 희망은 존재하지만 그것은 체제를 위한 희망,

즉 “우리의 희망이 아닌 희망”이 된다.


그러나 위멍롱의 팬들은 다른 길을 택했다.

그들은 삭제된 기록을 복원하고, 사라진 글을 아카이브하며, 검열 속에서도 서로의 신호를 읽었다.

그들의 행위는 체제가 허락하지 않은 언어로 말하는 인간의 희망이었다.

그 희망은 거대하지도, 낭만적이지도 않다.

그저 “진실을 지우지 않겠다”는 작은 결심,

그 안에 인간적 존엄이 있다.


희망은 이처럼 양면적이다.

권력의 손에 쥐어지면 복종의 언어가 되지만,

인간의 손에 남으면 저항의 언어가 된다.

절망의 끝에서조차 질문을 멈추지 않는 행위,

그것이야말로 희망의 철학적 본질이다.


위멍롱의 죽음은 우리에게 이 질문을 다시 던진다.

“희망은 선인가, 악인가?”

그 답은 아마도 카프카의 문장 속에 있다.

희망은 있다.

하지만 그 희망이 누구를 위한 것이냐 —

그것이 우리가 사는 세계의 진실을 가늠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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