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어떤 목소리로 정의를 말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정의란 무엇인가. 플라톤은 『국가』에서 정의를 조화와 질서로 보았다. 각 계급과 영혼의 부분이 제 자리를 지킬 때 국가와 개인은 정의로워진다고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한 걸음 달리, 정의를 “각자에게 합당한 몫을 주는 것”이라 규정했다. 그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분배적 정의와 시정적 정의를 구분하며, 정의란 언제나 형평성과 비례의 원리를 통해 작동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고전의 철학자들이 제시한 정의는 질서와 조화, 형평의 이름으로 공동체를 떠받치는 기둥이었다.
현대에 와서 롤즈는 『정의론』에서 정의를 “공정으로서의 정의”라 부르며, 무지의 베일 아래에서 합의된 원칙만이 공정한 제도를 보장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최소 수혜자도 불이익을 받지 않는 사회적 계약을 이상으로 그렸다. 하지만 아마르티아 센은 『정의의 아이디어』에서 완벽한 제도의 설계보다 현실에서 불공정과 부정의를 줄여가는 과정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센에게 정의는 이상적 상태가 아니라 사람들이 실제로 무엇을 할 수 있고 될 수 있는지, 다시 말해 ‘역량(capability)’의 자유에 달려 있다.
이 오래된 논쟁은 오늘날 새로운 장면에서 반복된다. 중국 배우 유멍롱(于朦胧, Yu Menglong)이 2025년 9월 11일 베이징에서 추락사한 이후, 그의 죽음을 둘러싼 해석은 단순한 사건 보도를 넘어선 사회적 진실투쟁으로 확산되었다. 경찰은 범죄 정황이 없다고 발표했고, 유가족은 무분별한 추측을 자제해달라 요청했지만, 온라인 공간은 곧 추모와 의혹, 루머와 음모론으로 들끓었다. 이 과정에서 중국 당국은 “허위사실 유포”를 단속하며 관련자를 수사했다. 진실은 침묵 속에 가려지고, 시민들은 그 공백을 의혹으로 채워갔다. (한국에는 팬덤이 약해서 그런지 꾀나 언론이 조용한 편이다.)
왜 권력은 진실을 말하지 않는가. 그것은 진실이 단순한 사실 확인을 넘어 체제의 정당성과 권력의 균열을 드러내는 힘을 지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권위주의 정부에게 진실은 위협이며, 침묵과 왜곡은 전략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억압이 시민들의 정의 감각을 자극한다. 유멍롱의 죽음을 둘러싼 온라인 참여는 “정말 무슨 일이 있었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억눌린 역량을 발휘하고, 디지털 공간을 새로운 광장으로 만든다.
이 목소리는 세계까지 울려 퍼질 수 있을까? 네트워크 시대에 정보는 국경을 넘어 흐르지만, 그 과정은 진실만큼이나 왜곡도 함께 실려 나간다. 음모론은 신뢰의 부재에서 비롯되며, 이는 제도의 신뢰가 무너졌음을 드러내는 지표다. 센이 말했듯 중요한 것은 완벽한 정의의 청사진이 아니라, 부정의를 줄여가는 과정과 사람들이 자유롭게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역량이다. 따라서 시민들의 목소리가 왜곡과 추측을 포함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억압 속에서 정의를 향한 인간적 갈망이 표현된 방식이다.
플라톤의 조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평, 롤즈의 공정, 센의 역량. 이 다양한 정의의 얼굴은 유멍롱 사건과 같은 구체적 현실 속에서 다시 소환된다. 정의는 추상적 이상이 아니라, 억압과 저항, 침묵과 목소리 사이에서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생생한 과정이다. 진실을 위한 목소리는 때로는 지워지고 때로는 왜곡되지만, 그 울림 자체가 이미 정의의 가능성을 증명한다.
그 울림은 언젠가 세계가 귀 기울일 수밖에 없는 정의의 언어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