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The Terminal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인 서석화 Jan 21. 2019

만기 출소일이 다가옵니다

그 정거장엔 배차 시간표가 없다- 사람 23

사람 23          

                    

             만기 출소일이 다가옵니다     



신기한 일이 계속되고 있었다.      



뭔가에 완벽하게 속고 있는 것 같은데, 그 ‘속임’에 더 철저하게 ‘속고’ 싶은 이상한 날들이 흘러갔다. 그러다 보니 속이는 사람보다 속고 있는 내가 더 뿌듯하고, 더 편안한 말도 안 되는 행복을 갖게 되었다.      


이상한 기도가 시작되었다.      


‘오늘은 어제보다 더 '속게' 해 주소서. 오늘은 어제보다 그 '속임'에 더 열광하게 해 주소서. 오늘은 어제보다 저를 속이는 그에게 더 '힘'을 주시고, 저에게는 더 속을 수 있는 '믿음'을 주소서. 오늘은 그에게 또 한 사람을 더 속일 수 있는 '지혜'를 주시고, 그 지혜에 속수무책 당하는 '선량한' 무리가 태어나게 하소서.’     


기도를 하며 살아왔다. 기도를 해서 살아올 수 있었다는 게 더 옳겠다. 물론 가족을 위한 기도가 기도 시간의 99.99%를 차지하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기도의 끝 시간엔 남을 위한 기도도 빠뜨리지 않았다. 친구나 지인, 심지어 몇 단계 건너 전해 들은 모르는 사람들도, 기도가 필요하다 생각되면 막무가내로 도와달라고 떼를 썼다.      


그러고 나면 우선 내가 편안해졌다. 내가 뿌듯해졌고, 내가 평화로워졌다. 내가 좋은 사람 같았고 그런 내가 좋아졌다.      


그랬다. 내가 하는 남을 위한 기도는 ‘남’이 아니라 ‘나를’ 위한 거였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픽사베이


기도의 끝 시간에 구구단 외우기를 검사받는 사람처럼 후다닥 치렀던 남을 위한 기도가. 순서도 질서도 무시한 채 아무 때나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시간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심지어 남을 위한 기도로 99.99% 기도 시간을 채우다가, 깜짝 놀란 적도 많았다.      


오태영 할아버지 때문이었다.      


칠십아홉 살, 일 년 전 노인정에서 화장실에 가다가 쓰러져 실려 간 대형병원에서 위암 발견, 이미 장기 곳곳에 전이, 수술 불가의 상태에서 방사선, 항암 등 일체의 치료 거부로 의사와 간호사의 조력을 받으며 임종하기 위해 요양병원으로 온 환자였다. 담당의사는 정말 드라마 속에서 튀어나와 대사를 하는 사람처럼 ‘아마 사오 개월 정도로 보면 될’ 거라는 말을 했다.      


오태영 할아버지는 ‘대낮’ 같은 사람이었다. 밝았고 쾌활했고 유머도 개그맨이 울고 갈 만큼 탁월했다. 출근해서 인사를 하러 병실에 들어가면 내가 인사를 하기도 전에 동트는 새벽처럼 맑은 목소리로 ‘굿모닝!’ 하시며 웃으셨고, 침대를 새우고 눕히는 사소한 도움 하나에도 ‘고마워, 꼭! 복 받아.’하시며 또 웃으셨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기만 했다면 비슷한 분들도 그간 더러 계셨다. 삶에 대한 경외감을 저절로 깨우쳐주고 가신 분들을 보내며 병원 식구들은 또 각자의 감동만큼 시간의 질을 높여왔다.      


죽음 앞에서도 도망가지 않고 끝까지 삶에 대한 의지로 맞서다 가신 분, 자신은 잊은 채 가족을 위로하는 것에 남은 자신의 전 시간을 다 쏟고 가신 분, 흐려지는 정신으로도 어쩌다 찬 샘물처럼 반짝 정신이 들면 고3 손자를 위해 기도하던 분, 자신은 눈 뜬 채로 분명히 죽을 것이니 필리핀에서 식당을 하는 아들이 오기 전엔 절대로 눈을 감기지 말라고 거듭 부탁하던 분... 나는 짧게라도 그분들을 위한 기도를 잊지 않았다.      


내가 편했고 내가 따뜻해졌기 때문이었다. 내 슬픔이 위로받고 내가 안정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오태영 할아버지는... 오태영 할아버지를 위한 기도는 달랐다.      


“아마 이 계절이 가기 전에 나는 여기서 나가겠지? 만기 출소일이 다가오고 있어.”     

©픽사베이


침대를 조금만 세워 달라고 하셔서 머리 쪽을 사십오 도쯤 세워드리고 나오려던 순간이었다. 나는 평소 하던 대로 할아버지 쪽으로 몸을 돌려 잠시 할아버지와 눈을 맞추었다. 눈을 맞추며 환자의 눈 속에 내 안타까움을 넣어드리고, 내 눈 속에 환자의 시간을 넣는 것이 내가 하는 위로와 공감의 방식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시선과 시선을 통하여 터득되는 것은 무엇으로도 설명이 불가능한 ‘동행’의 의미를 가져다줬다.      


“그런데 이거 알아? 지금 내가 얼마나 가슴 뛰고 설레는지?”     


아마 내 눈이 먼저 흔들렸을 것이다. 죽음 앞에서 의연한 사람은 적지 않게 봐 왔다. 그러나 오태영 할아버지가 방금 말한 가슴 뛰고 설렌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나는 조금 더 가까이 할아버지 앞으로 다가갔다.      

“나는, 지금 만기 출소를 앞두고 있거든. 만기 출소, 알지?” 

“......”

“분명히 더 좋은 세상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 요행이나 운도 없이 꾸역꾸역 이 생에서의 시간을 나름 충실히 살았으니, 여기서 출소하면 분명히 더 좋은 곳으로 나는 가게 될 거야. 그렇지? 여기서 나가면 나는 더 열심히 살 거야. 팔십 년 가까이 살아본 경험도 있으니 말이야. 거기서는 뭘 하며 살까? 의사가 한번 되어 볼까? 국선 변호사가 되는 것도 좋겠다.”     


만기 출소! 죄를 지은 사람이 형을 받고 구치소에서 살다가 그 기간이 끝나 세상으로 나오는 것! 당연히 이후의 시간은 자유와 희망이 내포되어 있다.     


오태영 할아버지는 그걸 믿고 있었다. 아니 믿는 것뿐만 아니라 만기 출소 후의 세상에 대해 희망으로 부풀어 있었다.      


“아, 그렇다고 내 삶이 징역 사는 것 같았다는 건 아니야. 하지만 이제 저 세상으로 간다고 생각하니까 이곳에서의 삶보단 분명 좋은 곳이 날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거야. 만기 출소를 앞둔 사람들이 지금 나 같겠구나... 그래서 하루하루가 너무 길어. 어서 햇살이 쨍한 날씨에 큰 쇠문이 열려 새 옷으로 갈아입고 출소했으면 좋겠어. 며칠 남았지?”     


그래서 기도하기 시작했다. 내가 편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오태영 할아버지를 위해서 말이다. 그의 믿음을 나도 믿게 해 달라고! 할아버지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말로라도 이기려고 만기 출소 운운하며 자신을 속이고 있는 거라면, 그리고 나까지 속여 그 믿음에 가속을 붙이고 싶다면, 진짜 속게 해 달라고, 나는 기도했다.      


‘더, 철저히, 완벽하게, 속게 해 주세요. 오태영 할아버지는 죽는 게 아니라 만기 출소하는 겁니다.’      


신기했다. 동참하는 이가 있을 때 생각은 신념이 되고, 신념은 절대성을 가진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의 몸에서 수액이랑 모니터의 각종 선을 떼어내는데, 내가 걷어내고 풀고 있는 여러 개의 선들이 내게는 수갑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시트로 덮은 할아버지가 들것에 실려 나가는데 정말, 만기 출소하는 ‘새 사람’처럼 보였다.      


©픽사베이


햇살이 쨍한 날씨였다. 엘리베이터 문이 그날은 큰 쇠문처럼 장엄하게 열렸다. 흰색 시트로 몸을 감은 할아버지가 더 좋은 세상으로 나서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할아버지에게 마지막 말을 전했다.      


“오태영 할아버지! 만기 출소를 축하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내 자식 아비는 내가 수발할 거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