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정거장엔 배차 시간표가 없다- 사람 22
사람 22
어디서 저런 힘이 나는 걸까? 어디서 저런 마음이 나오는 걸까? 저런 당당함, 저런 의지는 도대체 어디서 온 걸까? 건들면 넘어질 것 같은 여윈 몸, 누가 큰 소리라도 지르면 금방 울 것처럼 그렁그렁한 눈, 몸 안의 핏줄이 그대로 보이는 얇은 살갗.
그런데 강하다. 무섭다. 독하다. 아니다. 솔직히 말한다면 불쌍하다. 불쌍해서 밉다. 미운데도 존경스럽다. 그래서... 슬프다.
혜진 할머니가 오늘도 하루를 종종거리며 402호와 병동 수돗가를 왔다 갔다 한다.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새벽에 올 때마다 쇼핑백에 열 개도 넘는 타월을 가지고 와 할아버지를 닦이고 또 닦인다. 침만 조금 흘려도 따뜻한 물에 수건을 적셔 닦이고, 하도 닦여서 말갛게 깨끗한데도 두 시간만 지나면 환의를 벗기곤 가슴이며 등, 팔과 다리를 또 닦인다.
혜진 할머니는 김현기 어르신의 아내다. 사실 법적으론 사십 년 전에 이혼했다고 하니 ‘아내’라고 할 수는 없는 처지다. 하지만 우리 중 누구도 혜진 할머니에게 아내가 아니라고 말할 사람은 없다. 어느 아내가 혜진 할머니처럼 지극정성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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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기 어르신은 사십 년 전 아내와 이혼 후 혼자 살아왔다고 했다. 그러다가 나이가 들어 몸이 노쇠해지자 하나뿐인 딸이 모시려고 했지만 극구 반대, 방도를 찾지 못한 딸이 할아버지의 건강과 안전을 위해 요양병원으로 모셨다.
딸네 집보다는 정당하게 돈을 지불하고 케어를 받는 병원이 편하셨는지 입원 후 한동안은 편안해 보였다. 침대에 앉아 혼자 바둑도 두시고, 신문도 일간지와 경제지 합쳐 세 개를 구독해 보셨다.
그러나 멀쩡한 사람은 올 리도 없겠지만, 멀쩡한 사람이라고 해도 환의로 갈아입는 순간 환자처럼 보이고, 마침내 환자가 되는 곳이 병원이다. 김현기 어르신도 예외는 아니었다.
처음에 입원할 때, 몹시도 예민하고 그래서 신경질도 많은 분이라고, 화를 낼 때는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며 초기 치매가 의심된다고 한 딸의 말이 그대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같은 병실에 있는 다른 환자가 내는 신음에도 잔뜩 짜증을 묻혀 화를 내기 시작했고,
신문이 조금만 늦으면 신문사 지국으로 전화를 해 고함을 질렀다. 평상시엔 별 반응이 없다가도 신경이 예민해진 날에는 혈압을 재기도 어려웠다. 압력이 가해지는 혈압계 퍼프가 아프다며 다른 손으로 집어 뜯기도 일쑤였다. 그럴 때는 온갖 쌍욕을 할아버지 분이 풀릴 때까지 들어야 했다. S대 출신의 대기업 임원이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그랬다. 김현기 어르신은 이미 중증 치매 환자였다. 아픈 사람, 그것도 대부분이 치매에 사지마비로 온갖 괴성과 불유쾌한 냄새가 날 수밖에 없는 병원이란 환경 탓일까? 현기 어르신의 치매는 가속이 붙었다. 딸도 못 알아보고 자신의 이름도 한참을 생각한 후에야 겨우 말했다.
혜진 할머니가 병원에 나타난 것은 그때부터였다. 면회시간이 따로 있지는 않았지만 저녁 여덟 시 경에는 자연스럽게 비워지는 병동에 혜진 할머니만 유일하게 남아 있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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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온 반찬으로 현기 할아버지 세 끼를 챙기는 것은 물론, 직접 갈아온 주스 역시 떨어지지 않았다. 현기 할아버지 손톱 발톱은 하루가 멀다 않고 깎이는 할머니 덕분에 늘 단정했고, 당연히 전기면도기로 단정하게 정리한 턱이며 입 주위는 파르스름하게 정갈했다. 요양보호사들이 기저귀를 갈아주면, 다시 풀어 꼭 수건을 빨아 몇 번이고 닦인 뒤 로션을 바르고서야 기저귀를 채웠다.
“이혼한 지가 언젠데 뭐 하러 엄마가 이 고생을 자청해서 하냐고 말렸지만 듣지 않으세요.”
사흘에 한 번은 꼭 드나드는 딸이 푸념하듯이 간호부로 와서 말했다.
“그렇지 않아요? 사실 엄마도 지금 성한 데가 없으시거든요. 고혈압, 고지혈증, 관절이며 허리, 저렇게 걸어 다니시는 게 신기할 정도란 말이에요. 하도 아버지한테 쫓아다녀서 그렇게 마음이 쓰이면 개인 간병인이라도 둘까?라고 했더니 저희 엄마 대답이 뭐였는지 아세요?”
“사십 년 전에 이혼하셨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할머니는 정말 대단하신 것 같아요. 저흰 매일 할머니 덕분에 감동, 감동의 연속이랍니다. 현기 할아버지 보세요. 어디 그렇게 깨끗한 환자가 있어요?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많이 사랑하셨나 봐요.”
박 간호사의 말에 한참을 대답이 없던 딸이 쓸쓸하게 웃었다.
“사랑이야 두 분이 서로 하셨죠. 무엇 때문에 이혼하셨는지는 사실 저도 잘 몰라요. 저는 그때 고등학생이었고, 공부 때문에 바빴고요. 대학에 들어가면서 엄마 아빠가 두 집으로 완전 분리되면서야 아, 우리 부모가 이혼했구나, 하고 깨달은 거죠. 그로부터 사십 년... 긴 세월인데... 두 분 모두 재혼도 안 하시고 혼자 사시다가 아버지가 저리 되신 거죠.”
“우리도 결혼해서 살아보지만, 이혼의 사유야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어서 물을 수도, 말할 수도 없는 거더라고요. 하지만 할머니를 보면 미워하거나 싫어해서 하신 이혼은 아닌 것 같아요.”
‘그때, 그 시간’이 이혼의 사유였을 거라고 나는 말하고 싶었다. 모든 원인도, 모든 책임도 ‘그때, 그 시간’ 일 거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가슴에서 한바탕 바람이 불었다.
“참, 엄마의 대답 말하려다가 딴 데로 샜네요. 글쎄, 이러시는 거예요. 내 자식 아비는 내가 수발할 거야!”
“......”
“엄만 아내라는 자리는 내놨는지 잃었는지 암튼 없지만, 아버지 자식의 엄마라는 자리만으로도 아버지에게 세상에서 제일 가까운 사람이라는 걸 말하고 싶으셨나 봐요. 어쩌겠어요? 그 힘으로 평생 살아왔다는 생각이 드는데, 이혼했다고 두 분을 남남이라고 어떻게 말하겠어요? 내 자식 아비는 내가 수발할 거야! 그 말을 듣고 참 많이 울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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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양병원에 근무하다 보면 하루에 적어도 한번 이상은 ‘감동’이란 걸 경험하게 된다. 그것이 책이나 뉴스를 통해 느끼는 것이 아니고 직접 보고 듣는 것이어서 감동의 파장은 깊고도 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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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열 시! 혜진 할머니가 퇴근하는 시간이다. 나는 할머니를 큰 소리로 배웅했다.
“할머니, 방문객들을 보면요, 제일 가깝고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 제일 오래 머물다 가시더라고요. 내일은 무슨 주스 만들어 오실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