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정거장엔 배차 시간표가 없다- 사람 27
사람 27
오민수 할아버지가 또 침대 머리를 올린다.
자연스럽게 몸이 ㄴ자로 되며 반듯하게 앉은 모습이 된다. 다음 순서로 팔을 뻗어 식탁을 올리고 병동 로비 쪽으로 시선을 보낸다. 누군가가 당연한 일거리를 맞은 듯 할아버지께로 간다.
그리고 순서도 틀리지 않고 침대 옆 협탁에서 하나하나 물건을 꺼내 식탁에 올려준다. 노랑, 파랑, 분홍, 세 종류의 편지지와 필통과 돋보기와 그리고 오래된 두꺼운 앨범.
오민수 할아버지가 또 편지를 쓴다.
©픽사 베이
협탁 서랍엔 오민수 할아버지가 받은 편지가 세 묶음으로 나눠져 가득 들어있다. 아내와 딸과 아들이 할아버지께 드린 편지들이다. 할아버지는 매일 세 통의 편지를 받고 매일 세 통의 편지를 쓴다. 편지를 쓸 때마다 앨범 속 사진을 보는 할아버지의 눈이 빛난다.
노랑 편지지는 아내에게 쓴다. 파랑 편지지는 아들에게 쓴다. 분홍 편지지는 아내에게다. 먼저 쓰는 순서는 그날그날 다르지만, 하루에 세 통은 반드시 쓴다. 그리고 병원에 올 때 꼭 같이 오는 세 사람에게 똑같은 말을 하며 편지를 준다. 무릎 연골이 닳아 아픈 아내는 혼자 보행이 힘들기 때문에 꼭 아들과 딸이 함께 온다. 그건 평일이든 주말과 휴일이든 변하지 않는 규칙과도 같다.
편지를 주며 할아버지가 말한다. 연하게 뺨으로 번져나가는 할아버지의 미소가 아름답다. 따뜻하고 평화롭다.
편지를 받는 세 사람이 대답한다. 그들은 각자 또 한 통의 편지를 할아버지 손에 쥐어준다. 눈꼬리에 살포시 접히는 주름 사이로 말랑한 웃음이 새어 나온다. 목소리가 맑고 안정되어 있다.
그들은 매일 같이 앨범을 본다.
©픽사 베이
신혼의 아내와 남편이 거기 있다. 임신해 배부른 아내와, 퇴근길 아내가 먹고 싶다던 자두를 사들고 종종걸음으로 골목을 뛰어오던 남편이 거기 있다. 주름 투성이 갓 태어난 아들과 딸이 있고 백일기념, 돌 기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입학과 졸업을 함께 한 네 사람이 있다. 눈썰매장이 있고, 제주도 용머리가 있고, 아빠 참관 수업으로 같이 만두를 만들었던 유치원생 아들과 딸이 있다. 한강이 있고, 드림랜드가 있고 롯데월드가 있고, 일본과 유럽이 있고, 비행기가 있다.
오민수 할아버지가 웃고, 아내가 웃고, 아들과 딸이 웃는다. 무릎 아픈 아내 무릎을 만져주며 할아버지가 또 웃고, 팔목이 드러난 환의 소매를 내려주며 아내가 또 웃고, 뽀뽀해, 뽀뽀해, 하며 아들과 딸이 또 웃는다.
세 사람은 돌아갈 때 서로를 오래 안는다. 아내가 할아버지를 안고 돌아서 다시 아들을 안고 또 딸을 안는다. 아들이 엄마를 안고 동생을 안고 아버지를 안는다. 딸이 오빠를 안고 아버지를 안고 힘껏 엄마를 안는다. 그리고 다시 네 사람이 양 팔을 뻗어 둥글게 서로를 안는다.
404호 오민수 할아버지가 있는 병실에서 매일 일어나는 일이다. 우리는 그곳에서 천국을 미리 본다. 가족을 보고 가정을 본다. 무엇보다 사랑을 본다.
‘사랑한다면 이들처럼...!’
어디서 들었는지, 어디서 봤는지, 기억엔 없지만 ‘아름답다’고 생각되는 어떤 ‘가치’를 본다. 숙연함은 당연히 오는 보상이다.
©픽사 베이
오민수 할아버지는 폐암 말기 환자다. 그는 삼 개월을 선고받고 요양병원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오늘, 그 삼 개월이 열흘 정도밖에 안 남은 오늘, 오늘도 할아버지는 편지를 쓴다. 그리고 편지를 받았다.
그들의 이별 준비는 완벽하다. 완벽해서 슬프지 않다. 다만 지극히 조용해지고, 지극히 깊어지고, 지극히 평화로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