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정거장엔 배차 시간표가 없다- 사람 28
사람 28
종교적으로 승화됐다거나, 핏줄과 관계를 뛰어넘는 깊은 정을 느꼈다거나, 투철한 사명감으로 보람과 긍지 속에 살고 있다거나,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나는 아프고 외로운 그들을 보며 왜 저들을 저렇게 만들었냐고 하느님과 부처님, 공자 맹자까지 원망하고 따지는 횟수가 늘어났다. 그러니 종교적인 승화는 말도 안 된다. 부릅뜬 눈으로 입을 벌린 채 두 팔과 두 다리가 사방으로 비틀려 굳은 사람을 보면, 사람이 어떻게 저런 모습이 될까 하며 눈이 감아졌다. 그러니 깊은 정을 느꼈을 리도 없다. 쌍욕에 폭력까지 휘두르는 치매 환자들에겐 안에서 차오르는 화를 누르지 못해 분노의 눈빛을 드러낸 적도 많았다. 그러니 투철한 사명감 역시 있을 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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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암 환자를 보면 그들의 기침 수만큼 나도 기침이 터져 나왔다. 뇌졸중 환자가 들어오면 나도 몸 어느 한쪽이 무겁고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각종 지병에다 거의 전부라고 할 만큼 덤으로 갖고 있는 치매 환자들을 보면, 나도 날짜도 요일도 얼른 짚어지지가 않았다.
걸어 다니고 있어도, 말을 하고 있어도, 병원과 집을 정확히 제시간에 오가면서도, 나는 아팠고, 불편했고, 그래서 외로웠다.
절대로, 비슷하게라도, 그들을 닮고 싶은 마음이 없을 만큼 겁이 났으니 ‘동화’는 분명 아니다. 삼 년 가까이 그들의 살을 만지고 그들의 눈을 보고 그들의 숨을 지켜봤다고 나도 모르게 닮아갔다고는 더더욱 할 수 없다.
허무! 기댔던 자리가 무너질 때 부서져 빠져 나가는 온 시간, 온 마음, 온 삶... 절망보다도 더 큰 생의 타격은 그렇게 찾아왔다.
누구든 청춘은 있었을 거고 당연히 풋과일 같은 사랑도, 한 여름 버드나무 이파리를 닮은 진하고 푸른 건강도 누렸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싱싱하고 아름다운 젊음이 가고 나면 바통 터치하듯 찾아오는 늙음과 그조차도 쓰러뜨리는 병마. 그리고 길고 암울한 외로움. 숨 쉬는 수보다 많이 들어차고 있는 허무는 그렇게 그들 속에 있는 나를 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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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건강도 젊음도 영원불변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태어나서 죽는 삶의 여정은 ‘나’라는 독립체에서 ‘우리’라는 집합체로의 이행이라는 것도, 그래서 깨달아졌다. ‘나’ 일 때는 나만 보였지만, ‘우리’가 깨달아지니,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 중 나와 절대 무관한 건 하나도 없다는, 아픈 인정을 할 수밖에 없어서였다.
내가 ‘그’가 되고 ‘그녀’가 되고, 나와 그와 그녀가 ‘우리’라는 공동체로 여겨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무남독녀 처지에다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성향을 가진 나로선 기적 같은 의식의 확장이 아닐 수 없다. 내가 나로만 여겨지는 시간이 계속됐다면 그들과 내가 하나가 되고 있는 듯한 이 두려운 일체감은 애초에 생겨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병과 외로움이 나 아닌 남들에게만 찾아가는 것이고, 요양병원은 특정 사람들만 가는 곳이며, 그곳의 그들이 보여주고 있는 안타까운 풍경 역시 나와 내 가족, 친구와 지인이 비켜갈 거라는 확신만 들었다면 말이다.
남의 일로만 여기면 절대로 안 되기 때문에 더 허무하고, 허무해서 더 남 같지 않은 어르신들, ‘그들과 내’가 아니라 ‘그들과 함께 나’가 되는 이 무한대의 <섞임>은 그렇게 나를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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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다. 아니었다.
한 번뿐인 생에 대한 의무를 생각하는 횟수가 늘어났다. 더불어 이 거대한 의무를 보기 좋게 수행하고 떠나야겠다는 의지가, 그간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필생의 욕망이 되어 가슴에 품어졌다.
그냥 살아왔구나, 하는 자책은 그래서 들었다. 숨 쉬고, 말하고, 걸어 다니고, 내 손으로 내 몸을 씻는 걸, 너무 당연한 걸로 알아 일 초도 감사해본 적 없었구나, 하는 반성도 수없이 몰려왔다.
이 세상에 올 때의 나를 나는 모른다. 때문에 내 생의 프롤로그는 내가 쓸 수도 없었을 뿐 아니라 내 몫도 아니다. 하지만 이 세상을 떠날 때의 나는 나를 안다. 내 생각과 내 꿈과 내 바람까지 완벽하게 알고 인정하며 그리고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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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와 도입부는 오래전에 부모님이 쓰셔서 나는 기억할 수 없다, 갈등과 절정 부분도 나를 포함한 남들과 함께 이미 써졌다. 남은 건 결말과 보충으로 써야 할 에필로그다. 온전히 내가 써야 할 부분이 남은 것이다. 그런데 그걸 자신이 쓸 수 없는 사람이 너무도 많은 세상에 내가 살고 있고 그대들이 살고 있다.
그래서 소망에 투지력이 더해진다. 남은 생에 단 하나 이루어야 될 것이 되어 온 핏줄을 끓게 한다.
요양병원과 거기에 계신 어른들과 함께 한 시간이 없었다면, 그분들을 보며 내가 그 모습이 된 것 같은 허무를 느끼지 않았다면, 나는 당연하게 결말도 아직 안 난 나이에 무슨 에필로그, 하며 속으로는 당연히 내가 쓰지!라고 자만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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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끝나는 날까지 ‘나’를 잃지 않은 ‘내’가 되어, 걸어온 길 발자국마다 ‘나’를 추억하고, 감사와 축복의 숨소리를 남기며, 명료한 정신으로 에필로그의 마침표를 찍을 수 있기를!
그것이야말로 태어나 ‘삶’이란 각자의 책에서 우리가 꼭 해내야 할 마지막 의무요 권리가 아니겠는가.
건강과 평화가 뜨거운 염원이 되는 것도, 그것을 위해 몸과 마음이 다잡아지는 것도, 절실한 기도가 되어 매일 내 무릎을 꿇리는 것도 그 때문이다. 남의 아픔에 내가 울고, 남의 외로움에 따뜻한 온기 한 자락 건네야 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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