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정거장엔 배차 시간표가 없다- 사람 29
사람 29
요양병원에 첫 출근을 하던 날 새벽,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서기 전에 나는 기도를 했었다. 아침이면 늘 하던 기도였다. 하지만 일을 잘하게 해 달라거나, 사람들과 잘 지내게 도와달라거나, 조무사라는 새로운 신분에 당황하지 않게 해 달라거나 하는 내용은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일은 성실하게 최선을 다할 각오가 되어 있었고, 사람들과의 화합은 내가 먼저 예의를 갖추면 저절로 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조무사라는 신분은 내가 자청한 일이었으므로 당황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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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편애가 심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을 공평하게 사랑할 능력이 없습니다. 이제 병들고 외로운 사람들이 모여 있는 요양병원의 조무사로 근무를 시작합니다. 모두 인생의 마지막 정거장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제 마음에 편애를 없애 주소서. 모든 어르신들께 똑같은 마음의 질량과 부피를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다음 세상으로의 탑승을 기다리는 그들의 배웅자로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똑같은 온기의 손을 흔들 수 있도록 저를 이끌어주소서.”
환자들을 편애 없이 공평하게 사랑으로 대하게 해 달라고 그렇게 기도하고 왔는데, 환자들을 채 다 보기도 전에 말이다. 조직원으로서는 당연히 서로 간에 예의와 존중이 확립되어 있을 거라고 무턱대고 믿었다는 것이 비로소 깨달아졌다.
물론 전체라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낯선 환경에 처음 들어선 사람에게는 한 명의 사람이 전체를 대변하는 법이다. 한 명이 예의 바르면 낯선 곳 전체가 온기로 가득 차고, 한 명의 무례와 무경우로 전체의 질적 등급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자기네들끼리는 웃으며 격의 없이 있다가도 조무사들 앞에서는 엄한 무표정으로 바뀌는 간호사, 사소한 일에도 어린아이 다잡듯이 질책과 꾸중을 소리 높여 내지르는 간호사, 그렇게 조무사를 자기들보다 못 배운 열등한 존재로 생각하는 것이 너무도 드러나는 몇몇의 간호사들에게 나는 맨 처음 놀랐다. 조무사를 동료로 생각한다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가장 가까운 동료지만 함께 일하는 시간이 없고 인수인계 때만 잠시 얼굴을 볼 수 있었던 조무사들, 그러니 친분은커녕 어쩌다 식당에서 만나는 다른 병동 조무사들과는 서먹한 기운을 감출 수 없었던 것도 참 불편한 일이었다.
간호부에 속해 있지 않으니 독립군 같은 별개의 무리로 자기들끼리 뭉쳐 있는 요양보호사들 역시 같은 직장에 다니는 동료 의미를 느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들 중 적지 않은 수가 새로 들어오는 조무사의 기선을 잡기 위함이 뻔히 보이는 억센 말투와 몸짓으로 거칠게 대하는 것도 거의 날마다 목격되는 일이었다. 물론 나도 당했다.
각기 다른 직군이 존재하는 병원이란 구조에서 위계는 인정한다. 하지만 진정한 위계는 존중과 예의가 선행될 때 더욱 강하게 서는 법이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 숙인다.’는 좋은 말도 있지 않은가.
어머니가 요양병원에 계실 때 보호자로 드나들던 때는 느껴본 적 없었던 병원의 인력구조에 나는 당황했다. 그동안 내가 속해 있었던 사회와 그 사회 안에서의 신분이 여지없이 무너지는 데는 반나절도 걸리지 않았던 것이다.
애초에 이 일을 하기로 마음먹은 게 자만이었나 하는 회의가 하루에도 수백 번 솟구쳤다. 당연한 순서로 사직서가 가방 안에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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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 진정성을 가지고 대해주는 간호사, 간호조무사, 요양보호사가 없었던 건 아니다. 그러나 그 숫자는 전체에 비해 너무 미약했다. 낯선 환경에서 전체가 주는 압도감은 몇몇에 대한 신뢰를 쌓기에는 너무 그 힘이 셌다. 한 사람도 사랑할 수 없었고 당연히 한 사람도 더 미운 사람들이 없었다. 나는 모두를 다른 세상 사람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는 작가다! 작가에겐 경험이 자산이다! 애초에 이 일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긴 이유 중엔 작가로서의 작품 소재를 직접 부대끼며 실감하고 싶다는 나름대로의 글쓰기 철학이 있었지 않은가. 따라서 이 시간은 내게 인생 최대의 선물이 될 것이다! 어느 작가는 구치소 장면을 더 실감 나게 쓰기 위해 일부러 카페의 유리잔을 집어던지고 고함을 질러 구치소에 들어가 본 적도 있었다지 않은가. 그냥 ‘보면’ 된다. 보고, 느끼고, 그래서 더 살아 있는 글로 내 소임을 다하면 된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우습게도 난 생애 처음으로 ‘공평’을 경험했다. 환자들을 편애할 까 봐 걱정했던 내가, 걱정의 대상으로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동료 전부를 내 관심 밖으로 몰아내는 공평을 경험한 것이다.
좋은 사람이 없으니 애착이 생길 리 없고, 애착이 없으니 마음이 편했다. 사랑하지 않으니 어떤 대접을 받아도 상처가 되지 않았다.
그냥 지내자. 기대도 실망도 결국 애정에서 비롯되는 거다. 나는 나한테만 충실하자. 내가 할 업무와 사람에 대한 예의만 지키자. 그렇게 먼 나라로 이민 온 사람처럼 그냥 겪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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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지 않으니까 아무것도 힘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렇게 하는 동안 내 자존이 회복되고 그것이 습관으로 굳어가는 이상한 체험을 했다. 습관이 된다는 건 무서운 것이다. 몸에 익고 마음에 익으니 모든 것이 원래 나인 것처럼 자연스러워졌다. 어느 사이 나는 공손한 내가 싫지 않았고, 참는 나를 칭찬했으며, 불합리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그것에 치이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그러자 ‘화평’이 찾아왔다. 미운 사람이 사라졌다. 사랑하지 않으니 정들 리도 없고 정들지 않아서 그럴까? 아무에게도 감정적인 부담이 느껴지지 않았다. 무관심이 선물한 자유는 기대보다 그 폭이 넓었다. 처음에 놀라고 절망했던 건, 무의식적으로 동료 간에 서로 사랑하며 잘 지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잘 지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상대의 모든 것에 예민하게 반응이 됐던 것이다.
최근에 이 년 정도 같은 병동에서 근무를 한 선배 조무사 한 명이 퇴사를 했다. 개인적인 이유로 갑작스럽게 결정된 퇴사였다. 나와는 성향이나 생각의 결이 너무 다른 사람이었다. 그래서 선배 대접을 충분히 해주는 걸로 그녀와의 마찰을 최대한 피해 왔었다.
그런데 그녀의 퇴사 소식이 전해진 날, 나로서도 깜짝 놀랄 수밖에 없는 내 마음의 움직임에 나는 당황하고 또 당황했다. 콘크리트로 완벽하게 차단된 벽에 균열이 생겨 그 사이로 바깥의 바람이 들어오는 것처럼 몇 날 며칠 한쪽 가슴이 저렸다. 퇴사 선물을 의논하는 자리에선 눈물까지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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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사랑하지 않았고, 당연히 정은커녕 동료 간의 친분도 없다고 믿어왔는데,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반응인가. 같이 근무하게 되면서 겪은, 나로서는 억울하게 ‘당한 일’의 기억들이 아직도 켜켜이 저장된 마음인데, 이 허전함은 무엇이고 더불어 따라오는 묵직한 무게의 그녀에 대한 걱정은 또 어찌 된 일인가.
나도 모르게 ‘정’이 들었었나? 아무도 싫어하지 않는 걸로 아무에게도 애정을 주지 않은 걸 만회해 왔는데, 정은 그냥 나도 모르게 드는 것이었나?
정은 그런 것인가!
사랑은 그 사랑이 향하는 상대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고 드는 감정이다. 그런데 정은... 모르게, 억지로 느끼려는 수고 없이도, 함께 한 시간이, 나 자신도 몰래, 연결하고 쌓아주는 그런 것인가.
퇴사 날짜가 정해지고 근무하는 며칠 동안 나는 그녀를 여러 차례 안았다. 그때마다 마음이 정말, 울컥거려졌다. 기도 중에 그녀의 이름이 떠올라 쾌유를 비는 시간도 늘었다.
사랑하지 않는다고, 미워한 적도 없다고, 시간은 사람 사이를 그냥 흘러가지는 않는다는 것! 알고, 만나고, 부대끼는 동안 그것이 쌓아지는 시간의 나이테! 그것을 우리는 어느 날 ‘정’으로 만난다는 것! 나도 모르게 정들었구나... 사랑의 고백보다 더 짙은 고백을 스스로에게 하게 된다는 것! 어느 사이 내 시간에 당신이 흡수되어 있었구나... 사람 사이란 그렇게 알게 모르게 서로에게 젖어든다는 것!
병원 식구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떠올려본다. 누구도 나보다 먼저 병원을 떠나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도 따라온다. 나보다 먼저 떠나는 사람을 보며 그 헛헛한 자리를 또 내가 배회하게 될까 봐 겁도 난다. 정이 든 것이다.
그렇다!
정은 모르고 드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보다 무섭고, 사랑보다 오래가며, 사랑보다 진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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