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정거장엔 배차 시간표가 없다- 사람 30
사람 30
문득 떠올라 며칠이 지나도록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살다 보면 가끔 그런 일이 있지 않은가. 아무런 이유도 없는데 어느 시기, 어떤 사람이 갑자기 들이닥친 손님처럼 내 시간 속으로 들어와 당황하는 일!
이번에도 그랬다. 왜 그분들이 나의 기억 창고 문을 두드리는 건지 알 수 없다. 그저 갑자기 생각났다. 갑자기 궁금해졌다. 그리고 갑자기 그분들이 그리워졌다. 실습했던 병원에서 만났던 두 분, 실습생이었던 내게 학생이 무슨 돈이 있냐며 매일 아침이면 스틱 커피 두 개를 주머니에 넣어주시던 이창수 할아버지와 김미화 할머니가 그 주인공이다. 물론 그 두 분은 남남이다.
두 분은 모두 치매를 앓고 계셨다. 그러나 두 분 다 완전한 말기는 아니어서 하루 시간 중 삼분의 일 정도는 치매가 맞나 의심될 만큼, 온전하고 바른 상태를 유지하고 계셨다. 다른 게 있다면 창수 할아버지가 미화 할머니보다 두 달쯤 먼저 병원에 입원하셨다는 것, 그리고 창수 할아버지는 치매 외엔 다른 질환이 없어 거동이 자유로운 분이신데 비해 미화 할머니는 치매에다 양쪽 무릎 수술이 잘 못 되어 걸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되셨을까? 그분들이 떠오르자 가장 먼저 따라온 궁금증이다. 그 궁금증은 어쩌면 돌아가셨을지도 모르는 그분들의 연세와 치매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랑, 그분들이 하며 보여준 그 ‘사랑’이란 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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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분은 사랑했다!
미화 할머니가 입원하시던 날, 앰뷸런스에 실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할머니와 창수 할아버지는 운명처럼 마주쳤다. 마침 병동을 돌며 걷기 운동을 하시던 할아버지가 막 엘리베이터 앞을 지나려던 순간이었다. 미화 할머니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울고 있었다.
며칠 전 할머니의 아들이 입원 상담을 하러 온 날, 병원에 입원하는 걸 계속 거부해 왔다는 할머니 상태를 듣긴 했지만, 울고 있는 할머니를 맞이하는 우리 모두는 저마다 먹먹해져 잠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때 창수 할아버지가 걸음을 멈추더니 눈물에 젖은 미화 할머니의 손을 두 손으로 꼭 잡았다. 할머니를 싣고 온 앰뷸런스 기사도, 할머니와 함께 온 아들과 며느리, 두 딸도, 아픈 마음에 할 일도 잠시 잊고 있었던 우리도 깜짝 놀랐다.
“어서 와요. 이젠 안심하고 살 데를 왔는데 울긴 왜 울어요? 아직 얘기네. 얘기야.”
그러면서 할아버지는 자신이 입고 있는 환의 소매를 아래로 내려 할머니의 얼굴에 흥건한 눈물을 닦아주었다. 미화 할머니가 창수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두 분의 시선이 부딪쳤다. 할머니의 울음은 어느새 뚝, 그쳐 있었다.
창수 할아버지는 미화 할머니에게 정말 아버지처럼 잘했다. 팔십이 넘은 연세라 혼자 걷는 것도 얼음판 걷는 것처럼 늘 조심해서 걸으시는 분이, 하루 두 번은 꼭 미화 할머니를 휠체어에 태워 병동을 돌아다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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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봐요. 아무리 봐도 당신이 제일 예쁘지? 김지미도 최은희도 당신보단 안 예뻐요.”
그때마다 할머니의 웃는 소리가 병동에 울려 퍼진 것은 물론이다. 실습생이었던 나는 물론 병동 직원들 모두에게 그 두 분의 모습은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고 그래서 자꾸 돌려보고 싶은 드라마와 같았다.
식사도 두 분은 꼭 할머니 병실에서 같이 하셨다. 국이 조금 뜨겁다 싶으면 할아버지는 입으로 몇 번이나 바람을 불어 입술에 대 보신 후 할머니 앞으로 놓아주셨다. 국 온도가 맞아 할아버지가 그냥 계시면, 할머니는 자기가 할아버지 국그릇을 당겨 할아버지가 했던 것처럼 호, 호 하면서 바람을 불었다.
“아이고, 이런 것도 할 줄 알아요? 다 컸네. 이렇게 기특해서 어쩌지? 예쁜 사람, 김미화 씨, 당신이 얼마나 예쁜 사람인지 알아요? 그거 꼭 알아야 해요.”
식사 도중이라도 할아버지는 수저를 놓고 몇 번이나 할머니를 바라보며 얼굴을 만지고 어깨를 토닥거렸다. 미화 할머니가 입원하시던 날부터는 나는 내가 실습을 마치는 날까지 두 분 어느 누구에게서도 치매 증상을 본 적이 없다. 그러나 밤엔 정신을 놓은 할아버지가 이 방 저 방을 배회하면서 할머니를 못 알아보는 적이 많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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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수 어르신, 대단하세요. 그 연세에도 연애 감정이 느껴지시니까요. 어르신 지금 우리 미화 할머니랑 연애하시는 거 맞잖아요? 그런데 우리 할머니 어디가 그렇게 예쁘세요? 두 다리도 못 써 같이 손잡고 걸을 수도 없는데. 휠체어 끌어 주시려면 힘도 많이 드시잖아요.”
하루는 할머니 병실의 간병사가 휠체어를 끌고 할머니를 태우러 들어오시는 창수 할아버지에게 말했다. 마침 할아버지를 도와 할머니를 일으켜 드리려고 내가 그 병실로 들어서던 참이었다. 그 병원은 각 병실마다 그 병실 환자를 책임지는 조선족 간병인이 따로 있는 구조였다.
“이 사람아, 두 다리 못 쓴다고 마음까지 못 쓰는 게 아니야. 사랑은 병들지 않아. 사람이 병드는 거지.”
가슴에 수만 송이의 꽃이 한꺼번에 만개하는 느낌이었다. 아니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세상에 널리고 널린 사랑에 대한 온갖 명제를 다 모아 붙여도, 창수 할아버지의 그 한 마디보다 내 심장을 진동시켰던 적은 없었다는 자각에 온 몸이 떨렸다.
그분들의 사랑은 조용했지만 풍요로웠고, 애틋했지만 슬프지 않았다. 격정적이진 않았지만 한결같았고, 짧은 시간이지만 영원보다 위대했다. 나는 실습 기간 내내 그분들을 만나는 기쁨과 거기에 더해 오랜만에 다시 ‘사랑’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귀한 시간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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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습이 끝나는 날, 나는 창수 할아버지 병실에 믹스 커피 한 박스를 사들고 가서 작별 인사를 드렸다. 미화 할머니를 휠체어에 태워 몇 바퀴 돌고 막 들어오신 할아버지는 침대에 앉아 계셨다.
“어르신, 매일 주신 커피 때문에 향기롭고 따뜻하게 실습을 했어요. 건강하시고 오래오래... 예쁜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예쁜 사랑이란 말이 혹 무례하게 들릴까 봐 주저되었지만 나는 하고야 말았다. 그렇게 나는 두 분의 사랑을 인정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것이 내가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이별 선물이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더불어 그것이 내가 할아버지에게 배운 사랑의 최고 명제 임도 기억하고 싶어서였다.
“응? 벌써 끝났어? 학생 선생님 덕분에 우리 미화 씨 휠체어에 태우고 내릴 때 힘이 덜 들었는데... 이제 또 언제 볼까? 한두 번이라도 볼 수나 있을까?”
“어머니가 3층에 계셔서 매일 오긴 할 거예요. 가끔 올라올게요. 두 분 뵈러요.”
그때였다. 창수 할아버지의 눈에 설핏 눈물이 차오르는 게 보였다. 할아버지는 그것이 민망하셨는지 또 환의를 아래로 내려 소매 끝으로 눈을 문질렀다. 미화 할머니가 입원하시던 날이 떠올랐다. 그때도 저 소매로 할머니의 눈물을 닦아주셨다.
“우리 보러 온다고? 우리가 언제까지 여기에 있을까? 이렇게 늙고 병들었는데. 이젠 하루하루가 달라서 말이야. 알지? 미화 할머니 자꾸 잠자는 시간이 늘어나는 거. 오늘도 휠체어에서 또 조는 거야. 이제 저러다 나도 몰라보겠지? 나도 그럴 테고.”
나는 무릎을 구부리고 창수 할아버지 침대 바닥에 앉아 두 팔로 할아버지 두 다리를 껴안았다. 그리고 말했다.
“할아버지, 사랑은 병들지 않아요. 사람이 병들 뿐이지. 할아버지가 해 주신 말씀이잖아요. 상황이 어떻게 변해도, 두 분의 사랑은 건강하게 세상에 남을 거예요. 사랑은 병들지 않으니까. 맞죠?”
“이런, 그걸 기억하고 있네? 우리 학생 선생님이? 영특한 사람인 줄 내 진작 알았지만... 고마워. 그런데 그건 정말이야. 그래서 세상이 돌아가는 거라고.”
“맞아요. 절대로 안 잊을게요. 그 말씀을 하시던 할아버지 목소리까지도 꼭, 잊지 않을게요.”
그렇게 나는 떠나왔다. 실습을 마치고 어머니께 들르며 두 번인가 오층으로 올라가 봤지만 공교롭게도 두 분 다 주무시고 계셔서 인사를 드리지는 못했다.
어떻게 되셨을까? 그 병원은 사실 이제 내겐 생각만으로도 눈물이 나는 장소다. 실습을 마친 일 년 후 갑작스럽게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떠올리는 순간 아직도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 장소이기도 하다.
그런데, 창수 할아버지와 미화 할머니가 주시는 선물일까? 사랑은 병들지 않는다던 할아버지의 말이 오늘은 묘하게 어머니를 잃은 마음에 위로가 된다. 병들지 않는 무엇이 ‘사랑’이란 게 힘이 된다.
“사랑은 병들지 않아. 사람이 병드는 거지.”
창수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하루를 또 세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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