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불쑥 나타난 단어 하나에 온 시간이 정지된 듯하다. 언제 만나고 어떻게 잊어버렸는지도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히 알고 있는 단어! 한 번쯤은 내 입에서 나오고 또 한 번쯤은 문장에 섞어서 썼을 수도 있는 단어! 그런데 그것이 언제였는지는 알 수 없다. 언제였는지... 어쩌면 이리도 자연스럽게,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과거형의 말을 내뱉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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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창!
명사 <울울창창>의 준말, 주로 큰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매우 풍성하고 푸름. 더 이상의 설명이 오히려 사족이 되는 말 중에 이보다 더 즉각적이고 분명하며 정곡을 찔리는 말이 있을까? 밝고 맑으며, 싱싱하고 뜨거운, 한여름의 장마도 그 안에선 쨍쨍한 햇빛으로 풀풀 털고 일어나며, 홀로가 아니고 무리인, 그래서 한 사람의 웅변이 아니라 집단의 함성 같은 단어.
울창!
갑자기 시간이 멈춰버린 것도, 살아온 장면 장면을 들추며 별을 찾고 해를 찾아 허우적거렸던 것도, 현재로는 도저히 끌어올 수 없는 그 단어 때문이었다.
A는 말했다.
“울창? 팔공 학번인 우리에게 무슨 울창? 한 번도 울창하게 살아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아. 청춘도 민둥산처럼 지나갔어. 최루탄만 좌악... 울창했지.”
B도 말했다.
“울창은커녕 새 다리 같은 어린 나무 두어 그루 서 있는 정원만큼도 나는 못 살아봤어. 늘 꿈만 꿨던 것 같아. 실행은 현실이 늘 막았고.”
C가 말했다.
“그래도 지나 보니 젊음 자체가 울창했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지금은 꿈도 어디론가 다 흩어져 버렸지 않니? 울창까진 아니라도 조금은 빽빽한 동산은 우리 모두 가졌었어. 지금이 되어 보니 알겠네. 울창, 오늘의 동음이어는 울음이다. 얘들아, 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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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난감했고 바로 분노가 따라왔다. 세상에, 뭐 이런 일이 있나! 모든 단어와 말은 시제를 어떻게 붙이느냐에 따라 과거와 현재, 미래를 두루 돌아다니는 것 아닌가 말이다.
그런데 A와 B와 C가 내뱉은 ‘울창’이란 단어는 줄기차게 지나가버린 ‘과거’를 수식하고 있었다. 물론 이것은 젊음을 지나오고 그 길조차 가물가물한 우리 나이들이 한 말이니 전 인류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현재 청춘의 한 복판에 있는 젊은이들과 또 거기 있지 않은 다른 우리들, 혹은 더 연로한 사람들 중에라도 기꺼이 ‘현재형’, 혹은 ‘미래형’으로 자신의 시간을 수식할 수도 있지 않겠나.
그날 나는 한 마디도 덧붙이지 못했다. 예고 없는 충돌처럼 무방비 상태였고, 그 충돌이 덮쳐버린 몸 어느 한 부분도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알고는 있지만 낯선 느낌이 너무 강해 알고 있었다는 것도 의심될 만큼, 테이블에 손가락으로 울창, 울창, 쓰고 또 쓰기만 했다. 쓸 때마다 불쑥 튀어나와 옆에 앉는 단어들이 길게 이어졌다.
울창! 울창한 시간, 울창한 웃음, 울창한 꿈, 울창한 사랑, 울창한 최루탄, 울창한... 늙음, 울창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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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겐 그런 버릇이 있다. 평상심을 갖기가 힘든 날, 머리와 가슴이 제각각으로 나를 흔들어 위태로운 조바심이 덮쳐올 때, 그럴 때 나는 순간순간 스치는 단어를 그대로 몇 번이고 써본다.
화가 나면 화, 화, 화를 쓰고 또 쓴다. 일 분 앞도 막막할 땐 막막, 막막, 막막, 이라고 또박또박 쓴다. 눈물이 나면 운다, 운다, 운다, 하고 쓰고, 잠이 오지 않으면 총총, 총총, 너무 총총, 이라고 질릴 데까지 쓴다.
그러고 나면 희한하게도 내가 쓴 단어가 저 멀리 사라지는 걸 느낀다. 그날도 나는 ‘울창’이란 단어를 그 자리가 끝나고 헤어질 때까지 썼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차가 멈출 때마다 오른손으로 핸들 둘레에 빽빽이 썼다.
울창한 늙음... 에서 멈춘 뒤 더 이상 이어지지 않고 ‘울창’만 되풀이해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든 건 아파트 주차장에 들어와서였다. 나는 후배 K에게 전화를 걸었다.
“넌 울창하다는 단어를 들으면 뭐가 생각나니?”
“울창? 꽉 차서 모자람이 없는, 사기충천, 그런 거요.”
사전적인 대답이 나온다. 역시 국문과 출신답다.
“그럼 너는 너한테 시간으로 치면, 그러니까 과거, 현재, 미래 중 말이야. ‘울창’이 어디와 제일 맞는 거 같니? 모두들 과거 일색이어서 묻는 거야. 울창, 그러면 모두 지나왔다고 말들 하니 말이야. 너도 그러니?”
“아니요. 저는... 미래요. 미래는 모르겠으니까! 가능성으로 봐도 미래는 과거나 현재보단 우위에 있지 않겠어요?”
잠시 적막이 후배와 나 사이에 놓였다.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대답이다. 내가 아는 한 K는 지금이 가장 울창한 때를 살고 있다.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오래전에 알았던 사람을 다시 만나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재취업에도 성공해 성실하게 다니고 있다. 당연히 생활도 어느 때보다 안정적이고, 사랑받는 사람이 그렇듯 매사에 자신감도 넘친다. 그래서 ‘미래’라고 답할 수 있는 것이다. 미래는 현재를 담보로 설계되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언니, 그럼 언니한테는? 내 생각엔 언니는 늘 울창했던 것 같은데...”
늘 울창했다고? 내가? 어느 시기도 아니고 늘? 나가도 너무 나간 것 같은 후배의 말에 귀부터 멍멍해졌다. 나는 귓바퀴를 쥐어뜯듯 손가락으로 비틀며 소리 질렀다.
“얘, 너 근거 있는 말을 해. 아무 데나 붙인다고 말이 아니야.”
“왜 근거가 없어요? 언니는 늘 치열했잖아요. 기쁠 때도, 슬플 때도, 외로울 때조차 언닌 치열했다고요. 비켜간 적 있어요? 숨은 적 있냐고요. 늘 정면대결해 왔어요. 신기했죠. 저렇게 여리여리한 사람 어디에서 저런 힘이 나오나... 이제 생각하니 참 울창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정면대결했다고? 어쩌면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후배의 말처럼 내가 모든 것에 정면대결했다면, 그건 내가 힘이 있거나 배포가 커서가 절대 아니었다. 너무 약한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감정과 상황에 대들 엄두도, 무릎 꿇을 자신도 없으니 무조건 ‘겪어’ 보자며 살아왔다.
“제 생각은 그렇지만 언니는 언제를 ‘울창’에 넣고 싶은데요?”
내가 한 질문의 끝에는 꼭 내 대답도 내놔야 하는 게 경험으로 알게 된 질문의 법칙이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주차장을 나와 아파트를 향해 걷는데 동 앞 정원의 나무 한 그루가 보인다. 나는 수화기를 든 채 나무의 밑동부터 맨 위 가지 끝까지 올려다보았다.
한 곳만 바라보아서일까? 잎이 나지 않은 한 겨울의 빈 가지뿐인데도 하늘이 온통 가지 사이로 들어오는 것 같다. 빈 가지에 가득한 하늘이 울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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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창하다...”
“뭐? 울창하다니, 뭐가요? 언니는 언제냐니까?”
“얘, 너 이거 아니? 울창한 것의 주체만 바꾸면, 다 울창하다는 거!”
“...?”
“나? 난 지금이 울창해. 비록 내가 저 나무 같아도, 저 맨 위 가지 사이로 들어와 꽉 찬 저 하늘을 이렇게 울창하게 볼 수 있으니, 그게 울창이지.”
“겨울 한복판에서 잎사귀 하나 없는 나무를 보고 무슨 말하는 거예요?”
“그래, 네 말처럼 살아오는 내내 나는 울창했었는지도 몰라. 나는 미약했으나 내가 서 있는 세상은 늘 울창했잖아? 왜 내가 울창해야 되니? 이미 울창한 세상에 내가 왔는데?”
“세상이 아무리 울창하면 뭐해요? 내 것도 아닌데. 내가 울창해야 세상도 보이는 거지. 전 언니 말대로라면 세상이 너무 울창해서 나는 그 속으로 들어갈 엄두도 못 내고 살아왔어요. 언니는 언니 자체가 울창했다고요. 언니가 울창해서 많은 걸 걷어내며 지금에 왔단 말이에요. 전 미래에 더 울창할 거예요. 외롭고 가난했고 사랑받지 못했던 옛날은 울창의 울 자도 붙일 수 없었으니까.”
너 자신이 울창한 주체가 되어야 하는 네가 어떻게 내 말을 알아듣겠냐는 말이 마음속에 써졌다. K는 시인하고는 아예 말을 말아야 한다는 말을 핀잔처럼 남기곤 전화를 끊었다.
울창하게 살아본 적이 없는가? 그래서 서글프고 자기 연민에 가슴 아픈가? 나이가 들수록 ‘울창’은 과거의 단어라고 그냥 버렸는가? 나는 그날 밤 A와 B와 C에게 오랜만에 손 편지를 썼다. 단 몇 줄의 짧은 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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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가 울창해야 하니?
이미 울창한 세상에 와 있는데!
그래, 최루탄이 울창했던 천구백팔십 년이었지. 하지만 한 학기를 온통 휴강으로 때우며 배우지도 못한 리포트를 써내느라 눈물 콧물 범벅으로, 걸어 잠근 대학 정문 앞에서 동동거렸던 우리는, 안 울창했을까?
울창한 시간, 울창한 웃음, 울창한 꿈, 울창한 사랑, 울창한 우정... 그 안에서 우리는 늘 있었다. 울창한 최루탄은 정점이었지.
울창했었어. 지금도 울창해.
우리 울창하게 또 늙자.
세상은 여전히 울창하게 우리를 품어 줄 테니!”
밤이 울창하게 깊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