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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인 서석화 Feb 18. 2019

느낀다, 그게 진짜 말(言)이다

서석화의 참말 전송-  17

        느낀다. 그게 진짜 말(言)이다               



말을 거의 하지 않고 살고 있다. 


일상을 꾸려가는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말을 말하는 게 아니다. 전 우주를 통틀어 하나밖에 없는 유일무이한 존재인 나 자신의 속마음, 내 안에서 우러나오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따라서 지극히 주관적인 내 생각과 관점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입안에서만 맴돌다 삼켜지는 말들이 결국은 그 발원지를 찾아 깊고 내밀하게 스며든다. 그렇게 내 안의 세상이 조금 더 안전해진다. 조금 더 깊어진다. 조금 더 편안해진다.      


대신 두 배로 듣는다. 


©픽사베이


들으면서 상대의 주위에 자욱이 깔리고 있는 그의 느낌들을 집중해서 느끼기 위해 애쓴다. 목소리의 높낮이와 쉼표가 들어가는 지점, 한숨이나 웃음이 간혹 말 사이에 들어온다면 그 지점에 같이 머물려는 노력을 한다. 들은 말에 내 나름의 어떤 생각도 덧붙이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단 한 번의 호응의 추임새도, 행간에 궁금하게 잡히는 어떠한 질문도 하지 않는다. 그냥, 하는 말만 듣는 입장의 나를 고집한다.      


이런 것은 태생적인 나의 습성이기도 하지만 살아오는 동안 ‘말’이 ‘소통’과 비례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체득한 때문이라는 게 더 솔직한 것 같다. 세상은 어차피 타자들의 집합체, 한 사람에게서 발화된 말이 청자에게 일 프로의 왜곡도 없이 그대로 전달되고, 더욱이 화자의 심정이나 바람이 그대로 수용되는 청자란 지구 상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말’만큼 지난하고 쓸데없는 것이 없다는 결론이 났다.      


뜻이 왜곡되고 진심이 폄하되는 소통의 절벽에서 저편의 하늘에 대고 소리쳐 본 기억이 누구나 있을 것이다. 내게도 있었다. 그때 나는 내가 한 말의 문장을 모두 불러내 단어 하나하나 초성 중성 종성을 꿰맞추며 상대의 이해와 납득을 갈망했었다. 그러면서 깨달았다. 말이란 내게서 나가는 순간 내 것만은 아니며, 내 목소리를 따라 흘러나오는 순간부터 각기 다른 옷을 입고 각기 다른 시간을 거쳐 각기 다른 차림새로 청자에게 도달한다는 것을.     


아마 그 후부터였을 것이다


©픽사베이


나는 세 사람이 모이면 그중에서 제일 적게 말을 하는 사람이 되었다. 단 둘이었을 때도 그 입장은 변하지 않았다. 늘 듣는 입장이었고, 내게서 나간 말이 없기 때문에 상대의 수용 여부나 공감여부에 복습하듯 내가 한 말을 다시 생각하지 않아도 되었다. 당연히 돌아오는 길은 허탈하지 않았고 이후의 시간 역시 불필요한 무게감으로 무겁지 않았다.      


말이란 신문의 헤드라인 같은 것! 


그래서 나는 신문도 이미 눈에 뜨인 헤드라인을 억지로 외면하며 기사부터 읽는 편이다. 이미 각인된 큰 글씨야 어쩔 수 없다 해도 기사를 읽다 보면 말초적인 감각을 거머쥐는 헤드라인 안에 얼마나 많은 다른 내용이 들어 있는가. 여성 잡지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자극적으로 포인트를 확대해 문패로 건 제목이 결국은 내용을 왜곡하고 확대한 것에 지나지 않아 엉뚱하다 못해 불쾌했던 적 너무 많았다.        

이런 나에게 사람들은 그들만의 일방적인 말로 나를 분석, 해석, 결론 낸다. '입이 무거운 사람, 속이 깊은 사람, 잘 들어주는 사람...'. 이런 것은 긍정의 의미일 수 있겠지만 반대의 경우도 많이 당한다. '차가워 친해지기 어려운 사람, 세상 바깥에 서 있는 것 같은 사람, 아무한테도 관심 없는 사람...' 거기에 교양 깊은 주석을 더 다는 사람들도 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홀로 독야청청...’     


나는 어느 쪽일까? 그들이 하는 말을 그대로 받아 적긴 했지만 이 또한 그들로 보면 청자인 내가 바르게 듣고 이해한 건지는 사실 알 수 없다. 언젠가부터 유행어처럼 쓰고 듣는 ‘워딩’이란 단어, 주로 앞에는 ‘정확한’이라는 듣는 사람으로선 강요에 가까운 수식어가 붙는 단어, 하지만 그 ‘정확한’에 말로 글로 표현되지 못한 음절과  음절 사이, 문장과 문장 사이의 의미라는 것은 삭제되어 있는 단어, 그래서 나는 워딩이란 신출귀몰한 신조어를 거부한다.      


때문에 나는 사람들로부터 어떤 말을 들어도 내게 들린 음성만 기억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한 문장 뒤 잠시 정적이 있었다면 그 정적이 간직하고 있는 또 다른 말과 생각까지도 들으려는 노력을 하는 것이다. 말이란 발화된 순간에 얼마나 많이 본인의 뜻과 의지를 배반하는가. 진심은, 속뜻은, 말과 말 사이 말없음 표 안에 숨어 있는 것이란 걸 깨달았을 때, 내 관심은 그가 지닌 눈빛과 그가 기울인 등의 각도와 그가 서 있는 땅의 온도로 옮아갔다. 그렇게 말로부터 멀어졌고 편해졌다.     


©픽사베이


오늘도 사람들은 말을 한다. 


그러면서 소통 부재라는 한탄을 또 말로 한다. 말이 돼야 말을 하지, 라며 또 그 ‘되는’ 말을 찾으려고 말에 말을 늘인다. 말 수는 많아지는데 듣는 사람은 점점 더 뜻을 몰라 마음으로는 천 리 밖으로 도망가는 행렬에 기꺼이 동참하는 이 불가사의한 말의 홍수! 소통이 절실해 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없는 시간 쪼개 마주 앉아 문법에 오류 없는 말잔치를 벌이다가, 점점 더 꼬여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게 되는 경우를 우리는 너무도 많이 봐 왔다.     


지금 옆에 있는 사람이 있는가. 그렇다면 말없이 잠시라도 그의 마음을 짚어 그 길을 따라가 볼 일이다. 그리고 그 길에서 만나게 되는 단어를 죽 나열해보라. 그것이 그가 진정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말일 테니.     

반대의 경우도 추천한다. 어느 이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 그렇다면 말없이 그에게 옆자리를 내어주고 그저 쉬어지는 숨소리만 들려줘 보라. 그는 어느새 당신이 하고 싶은 말에 준비된 답을 마음으로 적고 있을 테니.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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