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석화의 참말 전송- 16
“굴속이야. 들어갈수록 깜깜해. 나가는 문도 없어. 하늘도 땅도 보이지 않아. 머리와 발바닥이 붙어버린 것 같아.”
©픽사베이
여고 동창 J의 SOS.
나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대신 혼잣말 같은 웅얼거림만 반복하다가 전화를 끊었다.
어머니 돌아가신 지 삼 년, 가장 큰 변화가 있다면 하늘을 바라보는 시간이 많아진 것이다. 그것도 그냥 무심히 보는 게 아니라, 샅샅이 훑는다. 길을 가다가도 조금만 구름 모양이 특별하다 싶으면 저절로 멈춰지는 발걸음, 혹시나 내가 못 보고 있나 제자리에서 전후 사방으로 뱅뱅 돌며 하늘을 살핀다. 어머니를 찾는 것이다.
저 하늘 어딘가에 계실 어머니... 그리운 내 어머니의 숨결과 목소리와 따뜻한 체온까지 하늘 아래에서 그렇게 나는 느끼고, 듣고, 만지며, 사는 동안 가장 힘든 삼 년을 지나왔다.
무심히 흐르다 또 무심히 모아지는 구름도 내겐 어머니의 몸짓 같고, 새벽과 대낮과 일몰의 하늘 색깔도 역시 내겐 어머니가 보내는 전언 같아 그때마다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당연히 스마트 폰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하늘 풍경이 저장되어 있다. 프로필 바탕 화면 역시 오랫동안 어머니가 계신 용미리 추모의 집 앞 하늘이었다.
나는 그렇게 어머니를 보낸 대신 하늘을 온통 내 것으로 하면서 어머니 슬하에 살고 있는 나를 느껴왔다. 저 하늘이 내 머리 위에 있는 한, 내가 저 하늘 아래에 있는 한, 나는 어머니를 잃은 게 아니라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말이다.
©픽사베이
그런데 오늘 그녀의 전화를 받았다.
틀에 박힌 말이 아니라 구름 한 점 없이, 정말 파래도 너무 파란, 그래서 하늘 전체가 짙푸른 빛깔의 거대한 블랙홀 같은 모습에 사로잡혀 있던 시간이었다. 전화벨 소리에 깜짝 놀랐던 것도 내 온몸과 마음이 저 하늘 어딘가로 향하는 문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는 것 같은 강한 느낌 속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 하늘을 통과하면 분명히 어머니가 계신 세상이 있다는 확신이 든 날이기도 했다.
그러자 하늘 아래 모든 것이 터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터널은 시작과 끝이 있는 공간이다. 따라서 들어간 곳이 있으면 나가는 곳도 있다. 아무리 긴 터널이라도 계속 걷다 보면 끝나는 지점이 나오게 돼 있다. 아무리 깜깜한 터널이라도 걷다 보면 출구가 가까워지므로 희미하게라도 빛이 들어오는 걸 그래서 느낀다. 그리고 그 빛은 점점 더 밝아진다.
그러나 굴은 다르다. 끝나는 곳에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그 어떤 열린 공간도 가지고 있지 않다. 들어갈수록 깊고 깜깜한 데다 미로로 이어진다. 돌아 나오려 해도 첫 지점조차도 못 찾기 일쑤다. 당연히 들어갈수록 어둠과 막막함에 갇힌다.
출구가 없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 힘든 시절을 지나왔는지 모르겠다’는 어르신들의 무용담을 들은 기억을 누구든 갖고 있을 것이다. 아무리 힘든 시기, 힘든 상황도 끝나는 출구가 있어 지금은 다른 시기, 다른 상황으로 자신이 편입되었음을 뜻한다. 그런 자에게서 느껴지는 안도감과 자신감은 길고 어두운 시절을 지나온 자일수록 더 빛난다.
그분들이 예사로 하시는 그 말씀을 통해서도 삶이란 '터널'이라는 생각을 굳히게 된다. ‘지나왔다’는 건 ‘거쳐서 나왔다’는 것이다. 즉 계속 걸으면 나가는 문이 또 있더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어둡고 답답하고 악취 나는 공간이지만 열심히 사력을 다하여 걷다 보면 끝이 보이는 환한 곳이 반드시 나온다는 희망의 전제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
©픽사베이
지금 굴속에 있다는 친구에게 긴 메일을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그 때문이다. 오랜 지기이니만큼 나는 그녀가 지나온 길에서 마주쳤던 불행이나 아픔의 고비를 잘 알고 있다.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거쳐 온’ 그 고비들을 들추어 펼쳐 보여줄 때가 아닐까 해서 였다.
다시 하늘을 쳐다본다. 조용하고 깊고 너무도 맑은 가을 하늘이 거실 창문을 열고 천정 가득히 들어오고 있다.
©픽사베이
삶은 터널이다. 절대로 굴이 아니다. 터널 저쪽 세상에 어머니가 있다. 이 짙고 붉은 그리움의 터널도 충실히 겪고 견뎌내면 언젠가 기쁜 해후가 출구 저쪽의 세상에 마련되어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