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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인 서석화 Feb 15. 2019

누구나 자기만 가진 '헛간'이 있다

서석화의 참말 전송- 15


누가 내 몸 안에 헛간을 들이는가

가슴에 망치질 소리

온 밤이 들끓더니

휑한 헛간 한 채 등불도 없이 서 있다     

윤기 잃은 하늘 주저앉은 그 안엔 

하루 종일 별들 죽어가는 소리

벽을 흔들고

가문 땅바닥엔 손금처럼 희미한

길을 덮은 바람

빛 잃은 약속을 매어놓고 간다     

자고 나면 또 그만큼 넓어진 그 안엔

밤새 꾹꾹 짜서 널어놓은 

가파른 목마름

못 이룰 꿈으로 펄럭이지만     

사랑이란

크고 어두운 헛간 한 채 지어가다

결국은 그 안에 내가 갇히는 것

그림자도 내버린 캄캄한 헛간이

이제 나를 삼킨다     

사라지는 시간이

빗장 걸리는 소리에 놀라

한바탕 울고 있다

           

              -서석화 詩 <내 마음의 헛간>              


©픽사베이     


도시에서 나고 자란 나는 사실 ‘헛간’을 모른다. ‘헛간’이라고 발음해보면 입술 안에서부터 허허로워지며 갑자기 빈 몸이 된 것처럼 한기가 느껴지는 단어. 국어사전에는 ‘명사이며 문짝이 없는 광’을 이른다고 나와 있다.      


문짝이 없으니 언제든지 들고나는 바람과 먼지, 그 사이를 스치듯 지나가는 사람들의 무의미한 시선, 그 자리에 있음에도 있음에 대한 존재 한번 드러내지 못하는 곳. 보호받지 못한 모든 것이 그렇듯이 저절로 흘러간 시간과 저절로 지나간 기억의 자국만 녹슨 놋그릇처럼 푸르고 흐리게 떠돌고 있는 곳.     




헛간!
집안에서 가장 허름한 곳! 그러나 버리기엔 아깝고 또 언젠가는 쓰일지도 모르는 물건을 그냥 넣어두는 곳. 그러다 긴 세월 한 번도 쓰지 않은 물건은 먼지에 덮여 구석에서 잊히는 곳. 문짝이 없으니 누군가 거저 집어가도 그만이나 울안에 있으니 내 영토인 것은 분명한 곳. 집안을 발칵 뒤집고도 못 찾은 물건이 결국 발견되는 마지막 장소.


그래서 그랬구나. 그래서 글자를 써 놓고 바라보기만 해도 저절로 한 데 나와 있는 것처럼 추워졌구나. 나는 ‘헛간’에 매료되었다.      


누구나 마음 안엔 자신만의 헛간이 있을 것이다. 헛간에서 먼지에 덮여가는 시간, 사랑, 꿈... 그러면서 우리는 스스로 헛간이 되는 건지도 모른다. 사라지는 시간, 잊어지는 사랑, 포기했던 꿈을 문짝도 없는 마음의 광에다 밀어 넣어 놓고, 버리기엔 아깝고 쓰기엔 번거로워 문짝도 만들어 달지 않은 채 외면해온 건 아닐까?      


“사랑이란/ 크고 어두운 헛간 한 채 지어가다/ 결국은 그 안에 내가 갇히는 것”이라고 나는 썼다.           

©픽사베이     


어찌 사랑뿐이겠는가? 살면서 시시각각 갈증을 일으키게 하는 모든 것들, 삶이란 결국 헛간의 넓이를 키우는 과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분명한 건 ‘헛간’이란 쓰레기 처리장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아직은 쓸 만하고 언젠가는 필요하며 손질하면 새 것보다 더 유용할 수도 있는 물건을 넣어두는 곳이 헛간이다.      




아파트 베란다 한쪽에 있는 창고가 그렇지 않은가. 물론 잠금장치까지 달린 튼실한 문이 달려 있고 집 내부에 있으니 문짝이 없는 데다 실외에 있는 헛간과는 차별이 되겠지만, 내 개인적인 느낌은 거의 같다.       


창고에 들여놓는 물건일수록 포장을 더 견고하게 해 놓는 건 나만의 아이러니일까? 상처 나면 안 돼. 깨어지면 안 돼. 잃어버리면 안 돼. 꼭 다시 필요할 거야. 그런 마음이었다. 그러면서 나는 여러 겹으로 싸고 또 쌌다. 그러고도 불안해 테이프까지 칭칭 둘러 내용물을 꼼짝 못 하게 가두었다. 그러다 어느 날 그 어떤 기억이 찾아와 그 갈피를 더 깊이 들춰보고 싶을 때, 창고 문을 열고 그 앞에서 물끄러미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나를 만난 적 많았다.         


©픽사베이     


아무리 두껍게 포장하고 테이프로 감아 오랜 세월 밀어 넣어 두었어도, 그리고 그런 것들이 여분의 틈도 없이 꽉 찼어도, 나는 창고 안의 물건이 무엇인지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3단 높이 창고 제일 위 칸, 중간 칸, 그리고 아래 칸에 넣어둔 품목과 취급 주의사항까지도 줄줄이 외워진다. 그것이 무엇이었는지조차 알 수 없이 흘러간 시간의 두께를 생각하면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늘 내 마음의 헛간에는 어떤 것들이 들어있을까? 하루 종일 내 발치에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 내 그림자와 두런두런 무언가 얘기를 했다는 자각이 든 지금, 어제, 일주일 전, 한 달 전, 그리고 오래오래전 전설처럼 먼 기억들을 불러내 만나 보려 한다.      


헛간!
창고!
크기나 넓이보단 훨씬 많은 걸 담고 보관하고 있는 곳. 
오랜 외면에도 줄지 않은 질량과 부피로 언젠가의 소환을 기약하고 있는 곳.    


©픽사베이     


누구나 그 안에 가득한 것들을 하나씩 불러내 서로 민낯의 해후를 준비해도 괜찮을 때가 있다. 마음속 헛간의 존재를 들켜도 좋을 때, 그렇게 많이 외로울 때!



*논객닷컴 게재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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