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석화의 참말 전송- 14
특별히 불러내지 않아도 된다. 더듬어 찾아가는 길 반복해서 연습하지 않아도, 날짜와 시간까지 기억을 헤집어 꺼내놓지 않아도 된다. 상황과 그 상황을 굳이 다시 나열하지 않아도 된다. 그래도 떠오르는 게, 떠올라서 잠시 모든 시간을 물리치며 적요한 순간을 눈앞에 펼쳐놓는 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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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게도, 울게도, 어디를 바라보는지도 의식 못할 만큼 멍하게도, 갑자기 어깨에 내려앉는 온기를 팔을 올려 가만가만 만져보게도 하는 그 무엇, 전극이 연결된 것처럼 강렬하지도, 세상을 덜컹거리며 몰아치는 폭우처럼 위험하지도, 각인된 모든 것이 그렇듯 심박 수를 늘리지도 않는다.
추억이다. 추억은 그런 것이다. ‘추억’이라고 발음하는 순간 어떤 기억이든 그것에 둘러졌던 모든 감정이 해제되어 그냥 젖어들게 된다. 스미듯 찾아가고 찾아오는 것, 길을 가다 횡단보도 앞에서 그냥 건너편을 바라보고 서 있을 때의 잠깐의 멈춤처럼 사는 동안 그렇게 무심한 듯 찾아와 마음의 결을 가만가만 만지고 가는 것, 추억!
때문에 추억은 기억보다 상위 개념이라는 생각을 한다. 사람의 오감을 ‘집중’시켜 ‘그 자리’에 보존해야만 소장 가능한 게 <기억>이라면, ‘해제’시켜 ‘흩어 놓아도’ 언제든 내 것이고 소환 가능한 게 <추억>이기 때문이다. 물론 추억은 기억을 담보로 한다. 하지만 모든 기억이 추억으로 자리 이동되는 건 아니다.
기억은 영구보존되는 것도 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흐려지거나 자체 소멸될 확률도 크다. 하지만 어떤 기억이 추억으로 방향을 튼 순간 그것은 내가 나에게 부여한 또 하나의 숨길이 된다. 숨이 무엇인가. 의식하지 않아도 들이쉬고 내 쉬며 나를 살게 하는 비밀스러운 교신이 아닌가. 추억은 그 숨길을 어느덧 마음에 하나 더 놓는 엄청난 선물인 것이다.
하루를 만나도 그 시간을 추억으로 남겨 아주 편한 숨을 쉬게 하는 사람이 있고, 평생을 친했다고 우겨도 긴 시간만큼 층을 올린 기억뿐인 사람이 있다. 스토리까지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나는 어떤 시절이 있었다고 그것에 추억이라는 이름을 부여할 수는 없다. 반대로 한 번도 떠오르지 조차 않았던 어떤 시간과 그 시간 속의 사람이 온 마음에 잔잔한 진동을 일으키며 현재의 나를 다독이고 위로하며 미소 짓게 한다면 그것은 추억이다. 떠오른다고 다 그리운 것은 아니라는 내 생각은 여기서 강한 탄력을 받으며 하나의 명제로 선다.
기억은 자신의 뇌 용량만큼 호불호를 가리지 않고 싫든 좋든 저장되어 언제든 그 상황을 도출해낼 수 있다. 좋은 기억이 시간이 흘러도 좋게 다가오고, 나빴던 기억이 오래 묵혔어도 당시처럼 진저리를 치게 하는 것은 뇌의 저장 능력이다. 그것도 마음의 지시에 따른 발현이 아니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물론 맞다. 하지만 내 식으로 설명한다면 기억은 마음보다는 경험의 지시에 따라 분별 저장되는 것이다. 마음보다는 경험이 기억의 유무를 가르는 상위 개념인 것이다. 마음이야 어떠하든 경험한 이상 일정 기간 저장되고 보존되는 게 ‘기억’이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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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추억은 어떤가? 추억은, 시작도 끝도 마음 안에서 일어나고 또 마음 안에서 잔잔히 저문다. 그 마음이 가장 선하고 가장 평화로우며 가장 그립고 애틋한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추억이라 말해질 수 있는 것 가운데 악하고 불안하며 진저리 쳐지고 살기등등한 어떤 시간, 어떤 장면, 어떤 사람이 하나라도 있는가.
추억은 그렇게 온다. 만나려고 애쓰지 않아도, 피하려고 등을 완강히 세우지 않아도 물처럼, 공기처럼, 어느 날 나를 다시 살게 하는 마음을 풍경으로, 목소리로, 고요하게 펼쳐주는 것이다.
따라서 추억은 내가 소환하는 어떤 시절이나 어떤 장면이 아니라, 어떤 시절이나 장면에 내가 소환당하는 기꺼운 그 무엇이다.
나를 소환하는 추억을 나는 얼마나 갖고 있을까? 한글 자음 순서대로 성과 이름을 부르며 기억 속의 사람들을 떠올려본다. 새로 새긴 도장을 나열해 놓고 하나하나 찍어보는 심정이다. 어떤 이름은 선명한 인주 빛으로, 어떤 이름은 햇살에 바래 붉지도 노랗지도 않은 희뿌연 빛으로 드러난다. 불려 나온 이름 하나하나마다 그 이름을 장식하는 기억 꾸러미를 업고 있다. 기억은 그런 거다. 청하지 않아도 불쑥 들이닥쳐 마주 서는 이상한 해후 같은 거.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이 가난해진다. 따끈한 차를 종일 마셨는데도 온몸에 한기가 돈다. 머리에 각인된 기억은 불러낸 이름 수만큼 나열되는데, 가슴과 마음에 들어앉아 사는 동안 살갑고 든든한 지기가 되어준 추억은 몇 개 잡히지 않는다. 다시 ‘추억’이라 부를 수 있는 그것에 대해 대책 없이 겸손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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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순간이든 훗날 추억으로 명명되려면 모든 따뜻한 것들을 전제로 한다. 혼자든 상대가 있든 그 시간에 대한 진심을 첫째 조건으로 한다. 공감과 소통 역시 꼭 필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채송화 꽃씨만큼의 작은 부피라고 해도 감동과 그로 인한 행복감을 내가 느낀 경험이 바탕되어야 한다.
여기서 다시 생각한다. 살아오는 동안 따듯하고 진심이었으며, 공감과 소통이 완벽해 내가 행복했던 순간이 과연 몇 번이나 있었을까? 세월에 덮여 잊고 있었는 중에라도 문득 떠오른 생각의 끈이 자연스럽게 향하는 곳, 가슴이 데워지며 입 안 가득 미소를 출렁이게 하는 따뜻하고 평화로운 순간을 나는 얼마나 갖고 있을까?
살아온 시간이 육십 년에 가까우니 그 수도 셀 수 없이 많을 거라고 무턱대고 생각한 것은 오판이었다. 너무 많아 서로 엉켜 나를 헤매게 한건 기억이었지 추억은 아니었다. 추억은 기억의 미화, 기억의 가공, 나아가 기억을 승화시키려는 의지만으로는 절대로 얻어지는 게 아니었다. 추억은 처음부터 추억으로 제자리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귀하고 그래서 애틋하다.
이렇게 살아왔구나... 한번 살다가는 이 귀한 세상에서 중간 결산으로 받은 추억의 내력이 이렇게 적다는 자각이 사방에 수척한 시간을 겹으로 세운다.
나는 몇 사람에게나 ‘추억’을 만들어 줬을까? 몇 사람에게나 그 마음에 자리하고 그의 숨길을 따듯하게 데워줬을까? 내 이름을 떠올린 몇 사람이나 저절로 찾아오는 추억에 소환되어 그를 살게 했을까? 살아갈 힘이 되었을까? 내게 추억으로 회상되는 시간이나 사람이 이리도 초라하다면, 나 역시 사람들에게 추억을 남겨준 수는 초라하다 못해 잔고 제로의 빈 통장과 같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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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 처음으로 버킷 리스트를 쓰리라 결심한다. 습관처럼 그때그때 고치고 첨삭해가며 남들이 자신의 버킷 리스트를 쓸 때도 시도조차 해 보지 않았던 일이다.
첫 번째가 <추억 통장> 세 개 만들기다. 첫째 통장에는 받은 행복과 즐거움, 누군가가 만들어준 보람과 의미로 하여 추억이 된 것들을, 두 번째 통장에는 내가 준 행복과 즐거움, 내가 누군가에게 만들어준 보람과 의미로 하여 추억이 된 것들을, 마지막 세 번째 통장에는 이 둘을 합산하여 복리로 불어나게 하는 통장을 나는 만들 것이다.
지금껏 입출금 통장과 일정 기간 모아 목돈을 만들기 위한 적금통장은 늘 있어왔다. 하지만 행복하고 즐겁고 감사해서 추억으로 남은 순간을 모은 <추억 통장>은 생각도 해보지 않았다.
나는 이 세 개의 통장을 언젠가 세상을 떠나게 될 때 아들한테 유산으로 물려줄 것이다. 엄마는 남은 엄마의 시간에 이런 추억을 만들어준 사람들이 있어 행복했다고,
가깝고 소중한 사람들에게 이런 추억을 남겨주는 시간을 살 수 있어 너무나 다행이었다고, 그래서 엄마는 형제 없는 무남독녀의 외로운 삶이었지만 ‘우리’라는 든든한 관계를 추억으로 갖고 갈 수 있게 됐다고 말하리라.
그리고 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거듭거듭 꼭, 말해 주리라. ‘아들아, 너는 엄마보다 훨씬 더 많은 <추억 통장>을 자식에게 물려주는 그런 삶을 살라’고!
추억 통장은 행복통장이다. 보람 통장이다. 사랑통장이다. 유의미한 삶의 통장이다. 잔고는 가슴의 온도를 올리면 쑥쑥 불어날 것이다. 먼저 사랑하고 먼저 베풀며 먼저 이해하고 먼저 웃으면 이자는 고금리로 붙지 않겠는가.
*논객닷컴 게재 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