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석화의 참말 전송- 13
-서석화 詩 <하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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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아는 시인으로부터 카톡 한 통을 받았다. 사진 한 장이 도착해 있었다. 그리고 바로 아래 짧은 멘트.
“2호선 시청역에서 환승하다 아는 사람 시 같아서...”
서너 군데 지하철역에 이 시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몇 년 전에 한국시인협회에서 지하철 시를 공모한다는 공지를 받았다. 일반 시민 작품과 함께 무작위로 시인들의 작품을 게재한 현 지하철 시를 대대적으로 정비하려 함이라는 설명과 함께. 그래서 정해준 행 수에도 맞고 나름 아끼는 시라서 이 시를 보냈다. 그 후 시인들이 보낸 작품 중 꽤 높은 경쟁을 거쳐 선정되었다는 통보와 함께 시가 있는 역 이름도 받았다. 그리고 그만이었다.
나는 내 시가 있는 어떤 역도 찾아가 보지 않았다. 언젠가, 저절로, 마주치는 우연이
온다면 그때 봐도 충분하다는 생각 그 이상은 없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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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사진으로 도착했다. 카톡 창 위에 뜬 시 <하현달> 전문을 읽는데 오랜만에 가슴이 뛰었다. 삼십 대 중반쯤 쓴 시, 어느덧 눈앞엔 글자는 사라지고 그 시절 내가 본 하현달이 사방에 떠올랐다.
이십 년이 넘는 세월 저편의 풍경을 핼쑥하게 비추고 있는 달, 차마 부풀지 못해 허리를 구부린 모습으로 늘 머리에 화로를 얹고 있던 나를 식혀주던 달, 마음에 파수꾼 같은 얼음판을 세워주어 주저앉지 않고 이 세상을 직립으로 건너오게 해 준 달, 내 삶과 내 문학과 내 사랑과 내 기도를 모으고 모아 먼 어느 날 사방에 모난 데 하나 없는 둥근 결정판으로 나를 비춰줄 것이라고 소망을 갖게 한 달, 하현달...
그 시절 내게 달은 상현달도 보름달도 아닌 하현달만 보였다. 한 달 내내 나를 비추고 내가 바라본 달. 때론 숨기고 때론 가라앉히며 때론 분노와 절망조차 깎고 또 깎게 한 달. 시리도록 푸른 한기 속에서도 그것이 냉정한 이성으로 나를 찾아오게 해 준 달.
그 하현달을 지금 다시 바라본다. 시 <하현달>의 첫 행이 내가 보고 있는 하늘에 돋아난다. 내 살을 깎아 어둠을 넓힌다... 그리고 4행부터 7행까지 문장이 거실 창문을 두드리며 소리친다. 별들이 제자리에서/ 제 몸만 한 빛으로 어둠을 걷을 때/ 나는 어째서 살을 깎아야/ 하늘은 내 자리를 허락하는가... 기억 저편의 아스라한 시간 속 사람을 만난 것처럼 가슴이 삐끗거린다.
이십 년도 넘어 이제는 ‘옛날’이라는 표현이 전혀 이상하지 않는 그때, 기껏 나이라야 삼십 대 중반! 뭘 얼마나 살았다고, 그래서 뭘 얼마나 견디고 버렸다고, 나는 <하현달>이란 시를 썼을까? “내 살을 깎아 어둠을 넓힌다”는 문장을 잡아 시를 시작할 수 있었을까? ‘살을 깎는’ 아픔과 제대로 조우한 적이 있기는 했을까?
지금의 하현달을 바라보는 마음에 스무 개가 넘는 달력, 펄럭이는 소리가 요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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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지금’은 가장 극적이고 가장 확실하며 가장 현실적인 시간이다. 여섯 살 아이에게는 여섯 살 그때가, 스무 살 청년에게는 스무 살 그때가, 마흔이 코앞일 때는 마흔 언저리만 걸어도, 그렇게 모든 나이는 생애 최대치의 감정 경험을 하게 된다. 따라서 감정은 나이 따라 적립되는 게 아니고 언제나 그 나이를 산다. 그래서 생생하고 그래서 진짜다. 세월이 주는 이자 한 푼 붙지 않고 늘 그 시간의 얼굴로 찾아온다.
봄이 오고 있는 하늘에 하현달이 떠 있다. 다 깎여나갔어도 양쪽 모서리 중 어느 한쪽은 위로 들려져 있는 달의 모양이 새롭게 눈에 들어온다. 몸무게가 다른 두 사람이 타고 있는 시소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디 몸무게만일까? 떠오르는 모든 것이 줄줄이 양 모서리에 늘어선다. 그런데 그 어떤 것을 양쪽 모서리에 앉혀 봐도 하현달을 수평으로 만들지는 못한다. 오히려 한쪽이 자꾸 더 위로 올라간다. 아니 한쪽이 자꾸 더 아래로 처진다.
그랬구나. 하늘의 자리를 넓히는 일은 결국 사람의 꿈과 현실을 양쪽 모서리에 매달고 스스로 헛된 배를 싸매는 일이었구나. 캄캄하고 거대한 무덤 같은 하늘이 아니라 소망이 익고 기도의 응답이 준비되는 벅찬 신화의 공간이었구나. 그래서 하현달은 금식 중인 사람의 얼굴처럼 저리도 명료하고 깨끗했구나. 시 <하현달>의 마지막 부분을 외워본다. “보이지 않는 꿈이 부푼다/ 부푼 꿈속으로/ 만월의 내가 떠오른다”고 나는 썼다.
결국 나는 ‘희망’을 노래했다. 하현달의 차갑고 외롭고 가난한 시간이 내가 선택한 살을 깎는 아픔이었다면, 그 끝에 반드시 오고야 말 풍성하고 모나지 않으며 한없이 밝을 보름달의 시간을 나는 담보로 잡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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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다시 하현달을 소재로 시를 쓴다면 나는 첫 행을 어떻게 쓸까? 화자는 역시 하현달일까? 노트북을 켜는데 말 없던 밤하늘이 하현달을 젖히고 통째로 내 집 안에 들어와 있다.
*논객닷컴 게재 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