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정거장엔 배차 시간표가 없다- 사람 34
사람 34
“엄마, 왜 이제 와? 밥도 못 먹고 기다렸잖아.”
병실에 들어서자마자 순영 어르신이 두 팔을 벌려 나를 부른다. 두 시부터 시작되는 이브닝 근무에 들어가 막 병실 인사를 돌고 있는 참이었다. 앞서 들어간 박 간호사가 돌아보며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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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 딸이 많이 기다렸나 봐요. 어서 가서 안아줘야겠네.”
“순영 어르신, 오늘 뵈니 더 예쁘네요. 누가 발라 드렸나 봐. 로션 냄새도 아주 좋게 나요.”
나는 순영 어르신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눈을 맞춘다. 순영 어르신 두 팔은 어느새 내 허리를 감싸고 있다.
“엄마가 사준 거잖아? 내가 저 아줌마한테 발라달라고 했어. 우리 엄마 올 때 나 예쁜 냄새나게 해 달라고.”
“아유, 그랬어요? 잘하셨어요. 얼마나 좋아요? 향긋한 이 냄새.”
“우리 엄마가 얼마나 예쁜데? 그러니 나도 예뻐야지. 딸이니까. 그지?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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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 침대 향순 어르신이 무엇엔가 삐치신 듯 투덜거리시더니 소리를 지른다.
“저 노인네는 왜 자꾸 우리 올케한테 엄마라고 해대는 거야? 망령이 나도 한참 났네.”
나는 얼른 향순 어르신께로 다가가 어르신 손을 잡는다.
“어르신, 식사 많이 하셨어요? 오늘 점심 반찬은 맛있었어요?”
“거 왜 올케는 저 노인네 망령에 맞춰주고 그러는 거야? 그러니까 점점 더 망령이 심해지는 거야. 그래, 오라버니는 아직도 감감무소식이야?”
대답할 말이 없다. 향순 어르신의 올케는 이미 오래전 사십 대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돈 번다고 집을 떠났던 어르신의 오빠는 아무도 소식을 모른다는 말도 덧붙였다. 나만 보면 ‘올케’라고 하는 걸 보고 어르신의 며느리가 해준 말이었다. 내가 그저 바라보고만 있자 향순 어르신의 어깨가 처지더니 깊은 한숨을 내쉰다.
“그 화상은 도대체 어딜 가서 마누라 새끼도 나 몰라라 하는 거야? 올케 고생이 심해 어째?”
“어르신, 오라버니 곧 돌아오실 거예요. 맨날 기도하시잖아요?”
병실을 나오는데 두 어르신이 싸우는 목소리가 온몸에 감긴다.
“우리 엄마야. 저 노인네가 정신이 나갔나?”
“지가 미친 건 모른다고 한 말이 사실이구만. 남의 올케한테 다 늙은 노인네가 웬 엄마 타령이야?”
“거 참, 늙어도 곱게 늙어야지. 보자 보자 하니까 이 노인네냐. 짐승도 지 가족은 알아본다고. 우리 엄마를 뭐? 올케? 에잇, 그러니까 늙으면 죽어야 해.”
한 병실에서 누군가의 엄마도 되었다가, 또 누군가의 올케도 된다. 흐려져 아득해지는 기억을 붙잡고 사는 어르신들에겐 가장 애틋한 사람이다. 사람의 긴 일생 중에 결국 가장 애틋했던 사람이 마지막 기억과 시간의 주인이 된다는 걸 나는 그렇게 또 배운다. 옆 병실에는 또 나를 ‘막내’라고 부르는 철식 어르신이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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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거, 아는가.
이가 다 빠져 잇몸으로 웃는 어르신들의 웃음이 이가 나기 전 갓난아기의 웃음과 얼마나 닮아 있는지.
주름 사이로 햇살도 숨고 바람도 숨은 음영 짙은 얼굴이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지, 그 이야기 속에 아직도 살아 있는 꿈이며 소망이 얼마나 많은 색깔로 반짝이고 있는지.
때때로 고백하는 잘못과 후회의 한숨이 어린아이 젖 냄새보다도 더 진한 향기로 얼마나 우리를 숙연하게 하는지, 애틋한 누구를 부르는 그들의 목소리가 얼마나 간절한지.
그래서 그 앞에 있는 누구라도 그들이 부르는 사람이 되어 끝없이 안아주고 다독여주고 싶게 하는지...
피어나고 있는 꽃만 꽃인가. 만개한 꽃무리만 꽃밭인가.
시들고 있는 꽃도 꽃이다. 꽃잎이 떨어져 흙빛으로 서걱거리는 땅도 꽃밭이다.
한겨울 냉기와 눈이 덮인 곳이라 해도 색색의 꽃무리를 본 기억과 걸음걸음 느꼈던 향기에 대한 추억, 우리는 그곳이 꽃밭임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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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식 어르신 병실로 들어서자 어르신이 침대 자리를 내주며 앉으라고 손바닥을 활짝 펴서 두드린다.
“막내야, 학교에서 선생님 말씀 잘 들었어? 친구들하고는 안 싸웠지? 숙제는?”
식사 후 세척 때문에 틀니를 빼, 붉게 드러난 잇몸으로 웃는 어르신의 미소가 아이보다 더 해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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