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정거장엔 배차 시간표가 없다- 사람 33
사람 33
인계가 끝났는데 수간호사가 잠시 우리를 주저앉혔다. 간호부 특성상 인계 후엔 각자 파트에서 할 일이 시간을 다투며 기다리고 있는데 의외였다. 각 병실에서 가래 끓는 소리, 아프다고 고함을 치는 소리가 마음을 급하게 했다.
“향숙 어르신, 잠깐만 기다려. 아직 간호부 인계 덜 끝났나 봐. 곧 가래 뽑아드리라 그럴게.”
명희 요양보호사가 큰 소리로 달래며 그 병실에서 나와 자기들 자리로 돌아가 앉는 게 보였다. 막 점심을 먹고 온 후라 그들은 커피 타임을 즐기고 있었다. 혼자 근무에 들어가는 조무사들에 비해 요양보호사는 무리를 지어 일하므로 그들은 바쁜 와중에도 자기들의 휴식시간은 반드시 챙겼다.
“그래, 저랬구나. 우리가! 늘 그랬던 건 아니지만, 많은 부분 저렇게 했어.”
수간호사의 말에 우린 서로를 바라보았다. 할 일이 자꾸 미뤄지고 있다는 불안이 마음에 자꾸 조급증을 일게 했다. 수간호사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 중에도 차트를 뒤적이던 진숙 간호사가 차트에서 눈을 못 뗀 채로 물었다.
“뭘 저랬다는 거예요? 명희 보호사님이 뭘 잘못했나요?”
“못 느꼈어요? 나는 바로 저거다, 싶은데?”
핵심은 알려주지 않고 수간호사는 선문답 같은 말만 내뱉더니 한숨을 쉬었다. 그때 커피를 마시던 다른 보호사가 또 병실로 들어가는가 싶더니 곧 아이를 어르는 것 같은 말이 들렸다.
“어디? 아, 거기가 아파? 곧 약 발라주라 그럴게요. 조금만 참아. 아직 샘들 회의 안 끝났어. 착하지? 우리 정수 어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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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였다. 수간호사가 신경질이 잔뜩 묻음 몸짓으로 일어나더니 보호사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보호사님들! 어르신들한테 반말 쓰지 마세요. 어르신들이 아이예요? 왜 그렇게 반말들을 써요? 그러니 보호자들한테 컴플레인 들어오잖아요.”
“아니, 우리가 언제 반말을 했다 그러세요?”
명희 보호사가 억울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대꾸했다. 다른 보호사들의 시선도 일제히 간호부 쪽으로 쏠렸다.
“보호사님 지금 반말한 거 못 느끼세요? 간호부 선생님들도 마찬가지예요. 아무리 정신 줄 놓은 어르신들이라고 아이 다루듯 하지 않았냐는 거예요.”
“수 선생님, 그건 맞지만 반말이라기보다는 더 살갑게 대하려고 하다 보니 저절로 그랬던 거 같은데요.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한테처럼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말이에요. 일일이 존칭으로 예의를 차리는데 무슨 살가운 정이 느껴지겠어요?”
진숙 간호사의 말에 요양보호사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순간 가슴이 무엇인가로 막히는 느낌에 자리에서 일어나 물을 마셨다. ‘반말’이란 단어가 풍선처럼 부풀어 올라 목젖까지 막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 수간호사가 정수기 앞으로 가더니 컵에 물을 따라 자리에 앉으며 말을 이었다.
“샘들, 오전에 수간호사 회의에 갔더니 여러 보호자들로부터 컴플레인이 그치지 않는대요. 병원 직원들이 환자들한테 반말로 대한다고요. 처음엔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저 보호사 보니 우리도 그래 왔단 자각이 드네요.”
“우린 정스럽게 한다는 게 보호자들로선 불쾌했나 보네요. 근데 그게 그렇게 기분 나쁠까? 손녀가 애교 부리듯이 하는 말투였는데... 그리고 그렇게 말해주는 걸 어르신들도 좋아하시는 것 같지 않아요? 깍듯하게 존칭을 써서 대하면 여기가 남들 천지인 병원이고, 그래서 가족들하고도 떨어져 있는 상황이 더 실감될까 봐, 우리를 가족처럼 느끼시라고 그래 왔던 거잖아요.”
진숙 간호사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부근에 둘러서 있던 요양보호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수군거리면서 고개를 저어대는 것으로 이 상황에 대한 저항을 내보이고 있었다. 그때 수간호사가 모두를 둘러보며 조금 높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친절한 반말! 들어봤어요? 저도 오늘 처음 들었어요. 그거 쓰지 말래요. 아무리 병들고 늙어 요양병원에 모셨지만, 어른도 한참 어른인 자기 엄마를 아이 얼르듯이 하지 말아 달래요. 친절을 포장한 반말로 무례를 범하지 말아 달라는데, 보호자 입장에선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겠죠. 간호팀장 님이 강력하게 주의를 주신 거니까 지켜주세요. 삼 층에 입원하신 어느 환자 보호자가 그랬대요. 자기 엄마한테 ‘친절한 반말’ 쓰지 말아 달라고요.”
예상 못한 일격을 당한 사람처럼 머리며 몸이 후들거렸다. 훅! 하고 가슴으로 쑥 들어오는 바람을 맞는 것 같았다.
친절한 반말!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었다. 간결하면서도 정확했다. 누가 한 말인지는 몰라도, 그 말을 한 사람이 느꼈을 모든 감정이 일 프로의 오차도 없이 그대로 전달되었다. 그 사람인들 병동에서 자기 부모를 보살피는 직원들의 마음을 모르겠는가. 반말을 썼다면 그 의도를 모르겠는가. 하지만 아픈 부모이고 아픈 형제이니 더 감싸고 싶었을 것이다. 어차피 타인일 수밖에 없는 직원들이 아무리 ‘친절’을 내포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내 부모에게, 내 형제에게 '반말'을 쓰는 건 싫었을 것이다. 화가 났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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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보호자는 그랬대요. 당신들은 가족이 아니다. 그러니 아무리 딸처럼, 손녀처럼 살갑게 대한다고 해도, 그래서 다정하게 반말로 정을 낸다고 해도, 그건 결국 무례를 범하는 거다. 친절한 반말 하지 말아 달라. 늙고 병들어 정신까지 온전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가족인지 아닌지는 본능적으로 알지 않겠느냐. 그러면서 울더래요. 그러니 우리 조심합시다. 보호사님들은 더 각별히 주의해 주세요. 아래를 보이며 기저귀를 해야 하는 어르신들의 보호자들로선, 그걸 갈아주고 목욕을 시켜주는 보호사님들의 언행에 더 예민할 거예요.”
그날 이후 지금까지도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 말, 친절한 반말! 종류와 상황은 다르지만 사는 동안 우리가 겪을 수 있는 것이 어디 말뿐이겠는가. 마음을 드러내는 일이라면 말 말고도 많을 것이다. 정을 표현하고 싶다면, 사람의 외로움을 덜어주고 싶다면, 그들의 고통에 손잡아주고 싶다면, 시선이나 몸짓으로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진심은 그런 것 아닌가!
나는 병실로 들어가 석션 기계 스위치를 올리기 전 진미 어르신 손을 가만히 잡았다. 나만 들어오면 석션의 고통으로 목을 움츠리며 심하게 떨던 진미 어르신이, 의아한 눈빛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따뜻하고 평화로운 눈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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