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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인 서석화 May 15. 2019

백 세 할머니는 칭찬 공장 사장님

그 정거장엔 배차 시간표가 없다- 사람 36

사람 36     

                     

             백 세 할머니는 칭찬 공장 사장님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병동에 또, 애국가가 퍼진다. 올해 백수를 맞으신 경희 어르신이 부르는 노래다. 가사도 박자도 딱딱 들어맞는 완벽한 노래다.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서리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     


2절까지! 3, 4절까지는 이어지지 못하고 늘 거기에서 1절로 돌아가지만, 어르신의 애국가는 오늘도 밤낮없이 계속된다.     


“어르신, 손에 잡는 태극기 하나 사다 드릴까요? 그거 흔들며 애국가 부르면 진짜 유관순 같을 것 같아요.”     


“말도 예쁘게 하지. 유관순? 백 세 된 늙은 유관순이라... 그건 책에서도 못 봤지? 그러고 보니 올해가 3.1 운동 백 년 된 해네?”     


©픽사베이


저 완벽한 기억력! 모든 직원들의 입에서 탄성이 터진다. 경희 어르신은 올해 백수잔치를 한, 백 살 된 사람이기 때문이다.     



백 살! 한 달 전 앰뷸런스에 실려 경희 어르신이 입원하시던 날, 병동 직원들은 백 살 된 어른을 본다는 흥분으로 모두들 들떴다. 백 세 시대라고 뉴스마다 광고마다 떠들긴 했지만, 그건 사실 가보지 않은 미지, 이루어지지 않은 꿈과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진짜 백 살 된 어른이 우리 병원으로 입원한다니, 그것도 고관절이 부러져 수술했을 뿐, 칠십만 넘어도 병력에 당연한 듯 추가되는 치매나 뇌혈관 질환 하나 없이 건강한 분이라니, 우리는 모두 전설을 만나는 기분으로 경희 어르신을 기다렸다.     


“백수잔치를 하던 날 칠십팔 세 된 큰 아들이 할머니를 업고 춤추다가 테이블에 발이 걸려 넘어졌대요. 그때 할머니를 떨어뜨려 고관절이 나간 거죠. 아무래도 연세가 있으시니까요. 그때까지 마을 경로당에 지팡이도 짚지 않고 혼자 걸어 다니신 분인데. 신경 좀 써주세요. 제가 아는 분이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우리 병원 환자 중에 최고령이시니까요.”     


경희 어르신 손자며느리와 친구인 수간호사는 자신의 할머니처럼 출근하면 수시로 병실을 드나들며 경희 어르신을 챙겼다.     


“근데, 어쩌면 머리도 검은 머리가 더 많고 귀도 잘 들리시고 그 흔한 백내장도 없으세요? 다른 백세는 본 적도 없지만, 진짜 백세가 저 정도면 우린 뭐죠? 허리며 무릎이 안 아픈 데가 없고, 돋보기를 쓰지 않으면 어르신들 기저귀를 갈 때도 오줌인지 똥인지 분간이 안 되는 우리는... 이제 겨우 칠십 줄에 들어선 우리는 어떻게 산 거죠?”     

요양보호사 팀장이 경희 어르신을 병실로 모신 후 한숨을 쉬자 너나 할 것 없이 모두들 한숨이 터져 나왔다.      


“피부는 또 어떻고요? 주름도 별로 없어요. 게다가 날짜며 요일도 얼마나 정확히 아시는지, 백 살 되면 다 저런가? 말이 백 살이지, 백 년을 살았다는 거잖아요? 살아 있는 역사책이 저 어르신 아닌가요?”     


©픽사베이



수술 상처 드레싱을 하기 위해 병원복 하의를 벗기는 내게 경희 어르신이 노래를 멈추고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또 치료해 주려고? 고마워서 어쩌나? 늙은이 살 보는 거 싫을 텐데도 내색 안 하고... 그것도 하루 세 번 씩이나... 고마워.”     


“아유, 어르신. 고맙긴요. 저희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요.”     


“그래서 고맙다는 거야.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도 그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게 예뻐서 말이야. 세상엔 어째 이렇게 착한 이들이 많을까? 여기 보호사들도 얼마나 다들 순한지 기저귀 갈면서도 손길이 찬찬한 게 진심으로 하고 있다는 게 느껴져.”     



마음에 덜컥, 따뜻한 난로 하나가 들어와 앉는 것 같다.      


아픈 몸이 서글픈 데다 요양병원 입원을 유폐된 걸로 생각하는 많은 환자들을 봐 왔다. 자신과 세상에 대한 서러움과 분노로 하루가 짜증으로 뜨고 지는 수많은 환자들, 당연히 직원들에 대한 감사와 칭찬은 가뭄에 콩 나는 것보다도 드문 일이었다. 오히려 화를 내고 짜증을 부리며 듣도 보도 못한 막말까지 자신들의 감정에 따라 퍼붓기 일쑤였다.      


“요양병원 직원은 의사든 간호사든 간호조무사나 요양보호사든 모두 감정 노동자예요. 치료하고 보살펴주는 것이 주 업무이지만, 그것보다는 무례함을 참아야 하고, 부모한테도 안 들어본 쌍욕을 듣는 것도 모자라 치매환자들에겐 폭행도 당하니까요. 그래도 무조건 참아야지 대들거나 이치를 따질 수도 없잖아요?”     


“그래도 어떡해요? 요양병원 환자들에겐 우리들이 최후의 보루일 테니까. 자식한테 그럴 수 있어요? 부모 형제, 심지어 배우자라 해도 몸이 저 지경이 되면 그거 죄인 된 심정일 텐데 뭘 할 수 있겠어요? 그나마 병원은 돈 주고 있는 곳이라는 생각을 하니 당연히 우리도 돈 주고 부리는 사람들이라는 마음에 속을 드러내 보이는 거겠지요.”     

“보호자들도 자기들은 못 하면서, 그래서 부모 형제를 여기다 모신 거면서, 요구하는 걸 보면 죄다 심청이 저리 가라예요. 시간 맞춰 드리라고 간식은 잔뜩 사다 놓고 선 그거 한번 지접 드리지 않고 죄다 가버리잖아요? 어르신들 뭘 먹이는 게 힘들다는 거지 뭐. 못 씹지, 사레들리지...”     


“간식은 드릴 수 있죠. 어르신들 드시는 것 보면 아기 같아 보는 우리가 다 흐뭇하니까요. 그런데 아무리 병원비 내고 있는 거지만, 자기 가족을 여기 둔 사람들이 어쩌면 그렇게 고마움이란 걸 모르는지, 수고한다는 말이 그렇게 어려운 건가?”     


누구 입에서 나온 말이건 모두가 동조하고 있는 말이었다. 말을 할 때나 들을 때나 회의와 함께 자괴감이 드는 현실에, 마음에 쌓인 사직서가 자꾸 그 부피를 늘여온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경희 어르신이 입원하신 것이다.      


©픽사베이


식사 시간이 되면 맛있다고 식당 직원들을 칭찬하시고, 주사를 놓으면 안 아프게 잘 놓는다며 솜씨 좋다고 하시고, 허리 아래부터 무릎까지 한 깁스로 목욕탕으로의 이동이 불가능해 요양보호사들이 침상 목욕을 해 드리면, 일일이 손잡고 거듭거듭 고맙다는 말을 쉼 없이 하고 또 하시는 경희 할머니.     


햇살이 밝으면 우리나라 하늘은 그림보다 예쁘다고 좋아하시고, 비가 내리는 날이면 수목들 잘 자라라고 비를 내려주신다며 하느님, 부처님께 감사기도 들이시고, 애국가 부르실 때 박수를 치면 노인네 웅얼거림도 허투루 듣지 않고 정을 낸다며 착하다고, 곱다고 또 칭찬하시는 경희 할머니가 오신 것이다.     


“어르신, 어르신은 왜 그렇게 칭찬을 잘하세요? 저희들 평생 들을 칭찬 지금 어르신께 다 듣고 있어요. 그래서 모두들 으쌰 으쌰 힘이 나요. 어르신은 정말 칭찬 공장 사장님 같아요. 매일매일 칭찬을 만들고 계시잖아요?”     

수액을 빼며 주삿바늘 빠진 자리를 알코올 솜으로 누르고 있는데 경희 어르신이 대답했다.      


“칭찬 공장 사장님? 거 참, 좋은 공장일세. 그래서 하느님이 입을 만들어주신 거야. 남한테 좋은 말 많이 하라고. 그게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온 이유야. 짐승으로 안 태어나고 사람으로 태어나 말이란 걸 하고 사는데, 얼마나 고마워? 그렇게 살다 가야지. 백 년쯤 살고 보니 제일 잘한 게 남한테 나쁜 말 안 하고 산 거 더라고. 칭찬 공장은 누구나 갖고 있어. 다들 가동을 안 해서 그렇지.”     


가슴이 먹먹해져 피가 멎었는데도 계속 알코올 솜을 누르고 있는데, 경희 어르신이 손으로 내 손등을 어루만지신다.     


“많이 먹어야겠어. 살이라곤 없네. 이 가녀린 몸으로 이 많은 노인들 치료해 주고, 말 친구 해 주고, 아픈 데 없냐고 알뜰살뜰 살펴주고... 고마워. 칭찬 공장 한 지 오래됐나 봐. 선생도? 같은 일 하는 사람들은 서로 알아보는 법이야.”     


주삿바늘 뺀 자국에 반창고를 붙이고 나오며 나는 대답했다.     


“어르신, 이제 칭찬 공장 한 번 세워 보려 구요. 그거 돈 많이 있어야 되는 건 아니죠?”     


경희 어르신이 손뼉을 치며 크게 웃었다. 병실을 나오는데 애국가 부르실 때보다 더 큰 어르신의 목소리가 들렸다.      


©픽사베이


“공짜야! 하지만 이문은 많이 나는 대박 장사야!”      


그리고 또, 애국가가 시작되고 있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서리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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