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잊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
영화 초반에 남자 주인공의 나레이션이다. 영화는 1990년 두 주인공이 처음 만난 날부터 시작하지 않고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이야기를 이어간다. 남자 주인공은 여자 주인공과 헤어지고 난 후 피렌체에서 미술품 복원 활동을 하며 지내다 우연히 첫사랑인 여자 주인공을 만난다. 서로 잊지 못하고 있지만 숨긴 채. 더구나 현재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 옆에 있다. ’잊을 수 없는 사람’을 가슴에 품고 있으니 현재의 사람들은 멀어질 수밖에 없다.
‘첫사랑은 이뤄지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그래서 더 애틋하고 아름답고…. 한편으론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 광고 문구처럼 세월의 흐름에 따라 잊혀지거나 새로운 사랑을 찾기도 한다. 첫사랑이 어린 나이에 하기에 어설프고 괜한 자존심과 오해로 헤어지거나 영화에서처럼 집안의 반대로 한쪽이 물러나기도 한다. 아버지가 내민 돈 봉투를 거절하는 여주인공을 보며 ‘일본도? 한국 드라마에서만 볼 수 있는 게 아니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돈이 많은 집안이라는 설정이 만들어낸 것인지, 외부의 상황 때문에 헤어질 수밖에 없어야 서로 잊지 못하는 사랑하는 사이가 가능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지금으론 너무 뻔해서 진부한 느낌마저 든다.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사랑은 혼자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만나고 사랑하다 헤어지는 과정이 반복되는 에너지를 사용하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이고 연애 감정이 없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한때 신조어로 ‘초식남’이 유행했다. ‘초식남’은 2006년 일본에서 칼럼니스트 후카사와 미키가 쓰면서 널리 퍼졌고 한국으로 넘어왔다. 연애와 섹스 대신 일과 취미활동에 관심이 많고 여자에겐 관심이 없는 남자를 뜻하는 말이다. 남자는 초식남이라면 여자는 건어물녀라는 표현이 있다. 연애 감정이 건어물처럼 말라버린 여자를 부르는 일본 만화 ≪호타루의 빛(ホタルノヒカリ)≫에서 유래된 단어다. 이성에게 관심이 없는 것이 공통점인데 단순히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받아 연애를 포기한 상태를 말하기도 한다.
초식남, 건어물녀는 자발적으로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라면 N포 세대는 외부의 영향으로 포기해버리는 것이다. 2015년 청년 취직이 어려워지며 생겨난 단어다. 처음엔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다는 3포세대였다가 5포, 7포로 이어지고 결국엔 N포까지 왔다. 집 같은 물질적인 포기에서부터 꿈, 희망 같은 바람도 포기하는 것까지 계속 늘어가다 보니 N포라고 하게 되었다. 사랑과 연애가 경제와 사회적 현실 앞에서 이젠 사치가 되어버린 청춘이다. 나 하나 건사하기 힘든데 연애와 결혼, 출산과 양육에 들어가는 비용이 커지니 당연한 걸까? 한국의 N포세대들이 <냉정과 열정 사이>의 두 주인공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들까. 팔자 좋게 사랑 타령이나 한다고 할까, 아니면 사랑을 할 수 있는 여유를 부러워할까. 그도 아니면 ‘나도 저런 사람 하나 가슴에 담고 있는데...’ 라며 누군가를 떠올릴까.
초식남, 건어물녀이든 N포 세대이든 누구나 첫사랑은 있을 것이다. 영화 주인공처럼 10년을 넘게 못 잊을 수도 있고, 이름도 얼굴도 어렴풋이 기억해도 잘 생각나지 않을 수도 있다. 연애 기간과 연애 감정의 깊이가 다르더라도 첫사랑이란 이름은 특별하니까. 연애의 끝이 결혼이 아닐 수도 있는, 현재 진형형의 사랑만 할 수는 없을까? 에너지와 감정의 소모가 힘들더라도 사랑만은 계속하면 좋겠다. 인생이 건어물이 되는 건 팍팍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