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딱 젖은 햇님이 만든 행복
해질 녘에는 절대 낯선 길을 헤매면 안돼
"해질 녘에는 절대 낯선 길에서 헤매면 안돼.
그러다 하늘 저켠에서부터 푸른색으로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면
말로 설명 할 수 없을 만큼
가슴이 아프거든..."
( 소설 '모순' 중에서 / 양귀자 )
먹먹한 글에서 벗어나 눈을 들었을 때, 버스는 한강 속으로 사라지는 해와 함께 한강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창 밖으로 푸르스름하게 어둠이 다가오고 있었다. 하루 종일 사람에 부대끼고, 시간에 끌려다닌 하루였다. 그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했던 소설 속 주인공 아버지가 바라보던 슬픈 일몰 속에 내가 서 있는 듯 했다. 수없이 고쳐서 낡아져버린 자기 소개서의 문구들, 합격 소식을 기다리며 마음이 닳아 없어질 때 쯤이면 도착하는 무미건조한 탈락의 메시지들...어스름한 해질녘이면 오히려 더 반짝대던 사무실 창문들 너머로 언뜻 보이는 누군가의 자리가 너무도 부러웠던 취업 준비생의 시절이었다. 해질 녘 낯선 길에서 헤매면 안된다고 말하던 소설 속 주인공의 아버지나 나나 세상 변두리에 밀려나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서서히 몰려오는 어둠과 함께 낮동안 꾹꾹 눌러왔던 슬픔도 몰려왔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기업에 입사한 후에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알콩 달콩 가정을 꾸린 후에도 해질녘의 시간은 그림처럼 각인되어 여전히 먹먹한 시간으로 남아있었다.
그렇게 이십여년의 세월이 흘러 나를 닮은 아이와 함께 바닷가의 일몰을 거닐었다.
"우와~저거봐, 너무 예쁘다. 엄만 해지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이상해져"
"어? 엄마, 왜 하늘 색깔이 이렇게 많아? 왜 하늘이 주황색이도 하고, 보라색이기도 해?"
"응, 햇님이 밤이 되어서 바닷속으로 들어가고 있거든."
"엄마....근데 햇님이 바닷속으로 들어가면 홀딱 젖을 텐데, 어떡하지?"
아이와 함께 큭큭대며 여러 가지 빛의 하늘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아이 말처럼, 하늘은 주황, 보라, 파랑, 검정까지 온갖 찬란한 빛들로 가득 차 있었다. 해질녘 빛의 스펙트럼이 이렇게도 많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정말 햇님이 바닷속으로 들어가 홀딱 젖어버릴 것 같은 동화같은 시간을 우리는 마음껏 누렸다. 한없이 슬프기만 했던 일몰이, 마음 따뜻한 일몰이 되는 순간이었다.
삶은 참 신비롭다. 매일 똑같은 해가 뜨고 져도, 그 해를 마주하고 있는 나와 우리는 어제와 같지 않다. 심지어 같은 '현재'를 누리고 있는 지금 이 시간에 대한 해석도 결코 같지 않다. 마냥 서운했던 일몰이 따뜻하게 다가올 줄 버스 안의 나는 상상이나 했을까. 석양의 스펙트럼만큼이나 선을 그을 수 없이 미묘하게 다르고,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 삶인 듯 하다. 어쩌면 이것이 나에 대해, 그리고 상대방에 대해 좀 더 너그러워져야 하는 이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누리는 빛은 서로 다른 스펙트럼 상에 있고, 우리가 유영하는 우주도 서로 다르다. 이 또한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나의 삶에 대해, 그리고 너의 삶에 대한 섣부른 판단은 유보해야 한다.
여전히 나는 해질녘 푸르스름한 하늘을 보면 마음이 저릿하다. 하지만, 이제는 푸르스름한 어둠 속에서 마지막까지 주변을 붉게 물들이며 사라지는 빛의 꼬리가 마냥 서운하지만은 않다. 변해온 나의 시간들로 인해, 그리고 나에게 매일매일 새로운 세상을 펼쳐주는 아이 덕분이다. 햇님은 오늘 밤 홀딱 젖은 옷을 말리느라 아주 늦게서야 잠이 들 지도 모른다. 어쩌면 미처 마르지 않아 꿉꿉한 옷을 억지로 우겨 입고, 서둘러 새벽 출근길을 나설지도 모른다. 저릿했던 해질녘의 시간에 행복한 풍경이 하나 더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