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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현관 Jul 01. 2022

감정수거함

ㅣ버리지 못하는 감정이 발목을 잡을 때



여름옷 정리를 했다. 오랜 시간 옷장에 있었지만, 여름이 다 가도록 한 번도 꺼내 입지 않았던 옷들이 제법 많았다. 평생 입을 줄 알았는데 옷장만 지킨 나의 여름옷들을 보고 있자니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아내가 미리 정리해놓은 옷들을 하나씩 입어봤다. 바지도 티셔츠도 아직은 제법 입을만해 보인다.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면 버릴 옷이 하나도 없었다. “이건 버리지 마, 올여름에 꼭 입을 거야.” 입어본 옷들을 다시 주섬주섬 챙겨 슬그머니 옷장에 밀어 넣는데 아내가 한마디 한다.     


“당신 작년에도 똑같은 소리 했는데 한 번도 안 입었거든, 내가 장담하는데 올해도 절대 안 입을걸.”      

  

결국 열댓 벌 되는 옷들을 둘둘 말아 안고 현관문을 나섰다. 아쉬웠지만 나의 여름 추억 몇 벌이 시커먼 의류수거함 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참 이상한 게 그렇게 애틋한 이별이 하루가 지나고 다시 일상이 시작되자 너무 쉽게 잊혀졌다. 오히려 옷장은 더 심플하게 정리가 되었고 공간 활용이나 필요한 옷들을 찾아 입기가 훨씬 수월해졌다. 버려진 옷들에 대한 아쉬움보다는 깔끔하게 정리된 옷장의 편의성이 훨씬 더 마음에 들었다.    


철길 위 사람

  

만약 살면서 부딪히는 수많은 문제도 이처럼 심플하게 정리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미묘한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경험하지만 정작 버려야 할 감정들은 잘 떨어지지 않는다. 간혹 다른 형태로 불쑥불쑥 튀어나와 나를 괴롭힌다.      


문제는 오래된 여름옷 갖다 버리듯이 둘둘 말아서 버릴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거다. 그렇더라도 버려야 할 감정이 있다면 이 시간 이후부터 더는 이 감정에 휘말리지 않겠다는 다짐과 함께 시커먼 감정수거함 속으로 나쁜 감정을 버려야 한다. 이 방법은 의외로 효과가 있다. 다시 그 감정에 사로잡히면 얼마 전 분명히 버렸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된다. 마음 건너편에 있는 또 다른 옷장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마음이 과거에 머물러 있거나, 너무 먼 미래만 바라본다면 현실의 삶은 메말라 간다. 먹고, 마시고, 잠자고, 놀고, 일하고, 사람을 만나는 것 같은 모든 행위는 현실의 삶이다. 적극적으로 몸을 움직이거나, 공간을 바꾸는 주변 정리나 대청소같이 무언가 푹 빠져들 수 있는 상황을 만들면 좋다. 일이 바쁘다는 핑계는 개선의 의지가 없다는 말과 같다. 우선은 내 감정이 소중하다. 별로 재활용 가치도 없는 감정들은 감정수거함에 버리자. 


진짜 하고 싶은 일에 고민하고 돈을 쓰자 더 이상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이기보단 자신을 먼저 토닥토닥해보는 건 어떨까? 옷장은 제법 괜찮은 여름옷 몇 벌이 새롭게 채워졌다. 




# 냉정한 평가는 좋은 글의 밑거름이 됩니다. 가감없는 댓글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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