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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현관 Jul 20. 2020

어차피 내일도 힘들 거니까

ㅣ성실함이 발목을 잡을 때 힘듦을 들어내도 좋다.


나는 어릴 때부터 성실과 근면이 몸에 배어있는 사람이었다. 초, 중, 고 12년을 개근했으며 대학도 개근상이 있다면 당연히 받았을 것이다. 성인이 되어서도 “사람이 참 착실하고 일을 야무지게 잘한다.”는 소리를 최고의 미덕이라 생각했다.


아버지는 “저놈은 자다가도 돈 생기는 일이라면 벌떡 일어날 놈”이라고 했을 정도로 이일, 저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그렇다고 가정형편이 어려웠느냐? 그건 아니었다. 먹고사는데 문제가 없었으며 학교 다니는데도 별 지장이 없었다. 그냥 사람은 당연히 열심히 살아야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일찍 철이 든 것도 아닌데 어디서 그런 생각이 왔는지 모르겠지만 내 삶의 모토는 “닥치고 열심히”였다.


장남으로써 책임감? 글쎄 한 번도 장남이나 책임감이라는 무게를 느끼거나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그냥 사람이라면 열심히 노력하며 사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벽 일찍 일어나지 못한다거나, 밤늦게 까지 일하는 것을 힘들어한다거나, 주말에 일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했다. 


거리의 사람들


요즘은 요리가 문화의 한 장르를 이룰 정도로 대세지만 당시에는 요리가 아무런 인기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식품을 전공했다. 시간이 지나 요리가 대세인 시절이 올 것을 예상했었냐고? 천만의 말씀......!!


내가 대학 가던 시절은 전공과 상관없이 대학의 문턱을 넘을 수 있는 소위 눈치작전이 통하던 시절이었다. 눈치작전은 형광등 한번 갈아본 적 없는 녀석을 전기과에, 평생 책 한 권 읽은 적 없던 녀석을 문예창작학과에 당당하게 합격시켜주었다. 졸업 무렵 오뚝이 식품과 칠성사이다 두 군데 면접을 봤지만 몽땅 떨어지고, 이름 없는 중소기업에 면접을 봤는데 특이하게도 그곳에서는 제발 와 달라는 식이었다. 하지만 너무 심심산골이라 그 역시 그만두었다. 이렇게 변변한 직장 하나 없이 졸업을 했다. 


그리고 백수의 나날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노는 날은 거의 없었다. 인테리어 디자인 학원을 다니면서 커피숍이나 호프집 등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섬유를 제조하는 방적공장에도 다녔는데 어느 날 조장님이 부르시더니 여기 직원 할 생각 없냐고 물어보았다. 이력서만 한 장 써오면 볼 것도 없이 바로 직원으로 채용할 수 있도록 윗선에 손을 써놓겠다고 했다. 나는 호의만 고맙게 받았을 뿐 끝내 취업은 하지 않았다. 조장님은 나를 볼 때마다 참 성실하고 아까운 친구라고 했다.


또 족발가게를 하는 부모님을 도와 주말이면 부동산중개업소나 숙박업소를 찾아다니며 판촉물을 돌리고 영업을 했다. 야구경기가 있는 날이면 경기장 앞에서 족발을 팔았고 일손이 모자라는 날에는 배달도 다녔다. 


학원을 수료하고 인테리어 회사에 취업을 했다. 명함에는 실장이라는 직함이 새겨져 있었다. TV 드라마에서 보듯 하얀 와이셔츠의 팔을 걷어붙이고 스탠드 불빛 아래서 늦은 시간까지 설계도면을 그리는 실장님 된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너무나 달랐다. 회사 트럭을 몰고 다니며 자재도 실어 나르고 현장에서 목수들의 잔심부름과 각종 장비들을 관리했다. 그 외에 목공소와 건축자재상을 돌아다니며 잡무가 많았다. 물론 새롭게 들어가는 현장이 있으면 본연의 임무인 실측을 하고 도면을 그렸다. 나는 말 그대로 멀티플레이어였다. 


그때도 어김없이 성실하고 일 잘한다는 소릴 들었다. 그게 최고의 미덕인 줄 알았다. 더 열심히 노력했다. 이른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그리도 주말에도 일을 했다. 하물며 지방에서 숙소 생활을 하면서까지 일을 했다.

하지만 일을 하면 할수록 무언가 모를 자괴감이 쌓여 같다. 이유를 모르고 달리는 경주마 같았다. “왜?”라는 질문이 자꾸만 나를 괴롭혔다. 열심히 쌓아 가는데 돌아보면 비어있는 느낌이었다. 그 무렵 회사를 그만두었다. 사장은 여러 차례 회유를 했지만 내 마음이 돌아서지 않자 월급을 정산하면서 만원을 빼고 주었다. 살면서 만난 최악의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내가 나간 후 여러 명의 사람들이 왔지만 채 한 달을 버티지 못하고 계속 그만둔다는 소식을 들으며 은근히 통쾌했다. 


그래서인지 조금 나아진 조건을 제시하며 몇 차례 연락이 왔다. "너같이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이 없다. 월급 더 줄 테니 다시 같이 일하자."는 것이었다. 20대 초반의 일이었다. 이때부터 "성실"이 지독히도 싫어졌다.

인간관계나 사회생활에 대한 가치관이 정리되는 시기가 아마 그 무렵이었던 것 같다. 


“사람이 착실하고 일을 야무지게 잘한다.”는 소리가 마냥 미덕이 아니란 것을 깨닫게 되었다. 금메달은 개인의 영광과 함께 국가의 영광이겠지만 성실과 근면은 개인의 만족과 회사의 가장 안정적 노동력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거기다 비판능력이나 문제의식 없이 착하기까지 하면 적당한 달란트를 던져주며 가성비 좋은 노동력으로 만들어가기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착실함과 야무진 업무능력이라는 포장이었다. 


그렇게 청춘의 끄트머리에 사회를 배웠다. 시간이 흘러 한 번쯤 인생을 뒤돌아볼만한 나이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열심 모드로 살아가고 있다. 도대체 언제 즈음에나 인생에서 “노력”이나 “열심” 같은 단어를 빼고 살아갈 수 있을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빈둥거린 날에도 박탈감보다 당당함에 고개를 들고 싶었다. 언젠가 인생을 돌아봤을 때 정말 열심히 살았어, 보다는 정말 신나게 놀았어, 라는 대답을 남기고 싶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이야기를 써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은 엄연히 다르다는 것을 잘 안다.


늘 강한 사람일 수는 없다. 책임감이 발목을 잡고, 살아가는 것보다 살아 낸다.라는 표현이 맞을지 몰라도 가끔은 나의 힘듦을 들어내고 위로를 구해도 좋다. 힘들다고 너무 슬퍼하지 말자 어차피 내일도 힘들 거니까

내가 부족하기보다 원래 세상이 그런 거니까.        


   



# 냉정한 평가는 좋은 글의 밑거름이 됩니다. 가감없는 댓글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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