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치매 안심 센터 이용하기
나는 엄마가 어떠한 경로로 치매 안심센터에 다니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경로당도 안 가는 엄마가 치매 안심 센터를 다니셔서 참으로 신기하기는 했다.
" 거긴 왜 가요? "
그때만 해도 육십이 다되어가도 철이 없는 딸은 앞으로 다가올 일에 대해 완전히 무지했다.
"건강에 좋겠지, 보건소에서 하는 거니까"
엄마의 대답을 들으면서 참으로 무심하게도 다행이네 하는 생각이 전부였다. 우리는 실제로는 한집에 살고는 있지만 아침에 출근해서 저녁에 돌아와서 잠자는 것이 전부인 뭔가 서로 간의 교류는 거의 없는 상태였다. 어려서부터 엄마는 무섭고 엄하고 그랬으니 엄마와 이야기를 많이 나누는 편도 아니고 특히 엄마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는 분이 아니었다. 말하자면 서로 필요한 말을 최소한으로 하는 무척 사무적인 모녀지간이었다.
나는 이런 관계가 좋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나의 딸과 나의 관계도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나는 엄마의 기대에 늘 모자라는 아이였다. 확인해 볼 길은 없지만 엄마는 늘 우등생이었다고 했다. 시험을 보고 틀리면 다음 시험에서 만회하기 위해서 잠도 안 자고 공부를 했다고 엄마는 늘 말했다. 그러나 나는 천하태평인 아이였고 공부를 잘하고 싶은 마음도 별로 없었던 거 같다. 나의 성적표를 보고 엄마가 한 말 중에 내가 평생 잊지 못하는 위대한 대사가 있다.
" 그 성적을 받고 잠이 오니?"
내 생각에 엄마는 아마도 나에게 밥도 먹이기 싫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엄마와 나는 정서적으로 유대관계가 깊은 편은 아니다. 즉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고민은 무엇인지를, 실제로는 별로 고민이라는 것도 없었던 거 같기도 하다. 뭔 목표가 있어야 고민도 있었을텐데....
지금 돌이켜 보면 부모의 입장에서 참으로 골치 아픈 아이였을 것 같다. 말썽도 없지만 뛰어나지도 않은 말하자면 그냥그런 아이. 어쩌지? 그런 생각이 들었을 듯하다.
청소년기부터 지금까지 엄마와 사적인 이야기를 해본 적이 거의 없다. 그러나 엄마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닌 거 같다. 말은 안 하지만 약간의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그 믿음의 종류는 최소한 학업 저하로 담임의 호출을 받지는 않을 정도가 아니였을까?
그러나 돌이켜보면 무슨 일에서 있어서든지 우선 순위는 늘 내일이었던 거 같다.
내가 지금도 엄마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기억 중에 하나는 자주색 하드보드 장정을 한 현대문학 전집을 사준 일이었다. 그 당시 가격으로 상당히 비쌌던 실제로 우리 형편에서는 사 줄 수 없는 책이었다. 철없는 이십 대 중반의 실업자인 딸은 그게 왜 가지고 싶었을까?
내가 아이를 낳으러 분만실로 들어갈 때 엄마가 나에게 한 말은 '첫 번째 이를 너무 꽉 물지 마라 이가 상한다'와 ' 두 번째 아무리 아파도 소리 지르지 마라. 소리 지른다고 안 아픈 거 아니다'였다. 맘껏 소리를 질렀으면 아무래도 덜 아프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지금은 든다.
아무튼 아이를 낳고 나니 간호사가 "정말 잘 참으시네요"라는 말을 했는데 그게 칭찬이라는 생각은 안 들었다. 우리는 서로 필요한 거 이외에는 대화가 없는 조용한 집안이다. 그건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식사하는 식탁도 말 한마디도 하지 않고 밥만 먹는 몹시도 조용한 식탁이었다. 물론 그릇에 수저가 부딪히는 소리가 나서도 안 됐다.
그러나 나는 밖에 나오면 수다쟁이가 되었다. 일종의 수다 총량의 법칙 같은 것이랄까? 인간은 자신의 의사 표현을 하고픈 욕구는 있는 법인가 보다. 이제 와서 나이가 육십을 넘어 엄마의 나이는 구십을 지나서 모녀간의 사랑의 형태에 관해서 생각을 해보니 기가 막히기도 하다. 엄마랑 이일저일 자주 의논을 하고 지냈으면 더 일찍 치매를 발견 할 수 있었을까? 난 도대체 뭘 하고 살았던 걸까?
내가 사는 성북구는 치매 안심 센터가 보건소와 같이 있다. 보건소 산하 기관인지는 모르겠지만 치매에 관한 다양한 일을 한다. 엄마에게 즉 나에게 요긴한 것은 일정한 시간에 가셔서 하루에 두 시간 정도의 프로그램에 참여를 하고 오시는 것이었다. 아무리 사무적인 모녀 관계라고 해도 하루 종일 집에 혼자 있는 것보다 훨씬 마음이 놓이는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내가 중국에 있을 때도 엄마에게 전화를 했는데 통화가 안되어 불안하면 안심센터에 확인을 해 볼 수도 있고 치매 관련된 진료도 있어서 엄마의 경우도 그나마 치매 진단을 일찍 받을 수 있었다. 만약에 치매 안심 센터에 다니시지 않았다면 치매 진단을 받는 것이 빨라야 내가 한국으로 돌아온 이년 정도 후에나 가능했었을 수도 있었다. 지금 생각만 해도 아찔한 일이다. 엄마가 진단을 받고 약을 드시기 시작하면서 훨씬 좋아진 상태를 나는 분명히 느꼈다. 그러나 의사 선생께 그 이야기를 하니 그냥 웃을 뿐이었다.
성북구의 치매 안심센터의 프로그램은 정상 군과 치매군으로 나누어져 다양한 프로그램이 있어서 각자 상황에 맞는 프로그램을 골라서 다니면 될 것 같다. 찾아보니 구단위로 치매 안심 센터는 다 있다. 더구나 비용이 전혀 없다. 치매 관리에 관한 한 선진국이란 생각이 들었다. 엄마의 치매 때문에 여러 감사한 분들을 많이 만났지만 치매 안심센터에도 젊은 청년이 할머니 할아버지를 참 다정하게 친절하게 대하는 걸 보면서 천사가 따로 없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아마도 센터에서 일하는 분들은 남을 위해서 봉사하는 아름다운 마음씨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있는 듯했다. 어쩌면 아직 세상은 많이 살만한 곳 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