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걷고 나서 바뀐 것.
제법 오래 걸었습니다. 작년 1월부터 걷기 시작했으니. 일 년 반이 되어가네요. 한 가지 일을 진득하게 지속하지 못하는 게으른 저에게는 꽤 큰 사건입니다. 지난달에는 330km를 걸었으니 한 달간 적지 않은 거리를 걸었군요.
걸으면서 크게 바뀐 것이 있습니다. 보통 어느 곳에 찾아갈 때 지도 앱을 이용하여 가장 빠르게 도착할 수 있는 길을 선택하게 되지요. 하지만 이제는 가장 빠른 길보다 중간에 걷기 좋은 길이 있으면 그 길을 선택합니다. 어차피 거기 갔다 와서 따로 운동하지 않고 거기까지 오가면서 걷기 운동할 기회로 삼는 것이죠.
그렇게 걷다 보면 자동차로 접할 수 없던 광경들도 접하게 됩니다. ‘어, 이곳에 이런 것이 있었네?’ ‘이 가게는 뭐를 파는 곳일까?’ ‘풀숲에 올라온 꽃은 이름이 뭘까?’ 눈에 띄는 것들을 보면서 몰랐던 꽃 이름도 찾아보고 이전에는 지나쳤을 가게도 기웃거리면서 길을 걷습니다.
어딘가를 가는데 빠른 길을 찾는 이유는 가고 오는 그 시간이 제 인생의 낭비적 시간으로 여겨지기 때문이었지요. 목적은 단지 그곳에 가 있는 것이고, 길거리에서 보내는 시간은 거기에 도착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소비해야 하는 시간일 뿐이라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길을 나설 때 가장 빠른 길보다 걷기 좋은 길을 선택하면서부터는 관점이 달라졌습니다. 조금 더 시간이 걸리더라도 거기까지 가는 길이 단지 도착을 위한 수단이 아니고 가는 길을 걷는 자체가 목적이 되곤 하지요.
이전에는 가장 빠른 길 하나를 선택하려 애썼는데, 이제는 거기에 이르는 길은 하나가 아니고 여러 길이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오늘은 어떤 길로 걸어가 볼까.’ 길을 선택해 걷는 것은 즐거움입니다.
여행도 마찬가지입니다. 몇 년 전 통영으로 여행을 간 적이 있습니다. 누구나 그러하듯이 저도 여행 가서 구경하고 노는 것은 좋아하지만 돌아올 때 막히는 길에서 보내는 시간은 고역이지요. 그것이 여행을 떠나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통영 여행 마지막 날 평소 같으면 긴 시간 운전할 것을 생각하며 가슴이 무거워졌을 겁니다. 지도 앱에서 가장 빨리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찾고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그날은 돌아오는 길에 놀멍 쉬멍 하며 이곳저곳 들러 구경도 하고 이것저것 먹기도 하면서 올라오는 길을 즐겼습니다. 물론 평소보다 돌아오는 시간은 길었지만, 오는 길 자체도 여행이더군요. 그냥 지나쳤을 소소한 볼거리들을 보면서 오게 됐죠.
도착지에 머무는 시간만이 여행의 시간이 아니고 오가는 길도 풍성한 여행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가장 빠른 길을 선택할 수도 있지요. 거기까지 가는 길이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 거쳐야 할 수단으로만 여긴다면, 길은 그냥 빨리 지나쳐야 하는 통로에 불과하지요.
어디 갈 때 조금 돌아가더라도 걸을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가끔 조금 일찍 떠나 걸어 보세요. 혹시 그 길에서 이전에 지나쳤을 어떤 것들을 만나게 될지도 몰라요.
길을 걷는 것은 지나쳐야 할 숙제 거리가 아니고 즐거운 놀잇거리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