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화가 나면 화를 내야 하나?
‘화가 나는 것’과 ‘화를 내는 것’은 다르지요. 뭐가 다르냐고요? 문장을 뜯어볼까요. ‘화가 난다’는 것은 ‘화’가 주어이지요. 화가 스스로 나는 겁니다. 그런데 ‘화를 낸다’는 것은 화가 목적어이지요. 누군가가 화를 낸다는 겁니다. 갑자기 무슨 국어 문법 이야기를 하냐고요. 문법 차이가 아니라, 화의 뒤에 붙는 ‘가’와 ‘를’이라는 조사 차이가 화를 이해하는 데 무엇보다 중요하지요. 조금만 더 들어 보시겠어요.
‘화가 나는 것’은 내가 어쩔 수 없지요. 하지만 ‘화를 내는 것’은 내가 하는 행위입니다. 화가 나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이유는 화가 내가 아니기 때문이죠. 내가 아니고 지가 나겠다는데 내가 어쩌겠어요.
그래요, 그렇다고 치더라도 화가 나는데 어찌 화를 안 낼 수 있어요? 말이 안 되지요. ‘화가 나더라도 화를 내지 마세요’라는 말을 하지만, 그런데 그건 어렵지요. 맞아요. 참 어렵지요. 화, 분노의 에너지는 불과 같아서 한 번 타오르면 끄기가 쉽지 않지요. 하지만 모든 불은 다 타고나면 결국 꺼지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화가 날 때 꼭 내가 화의 부탁 들어주듯이 매번 화를 낼 필요가 없겠지요. 화의 주어와 목적어 차이만 놓치지 않고 들여다보더라도 여러 문제가 풀리지 않을까요. 화가 나는 것은 내가 어쩔 수 없더라도 화를 내는 것은 내가 화를 내는 주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지요.
화가 나지도 않는 차원을 저는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화가 나는 것’과 ‘화를 내는 것’이 같지 않다는 것은 어렴풋이 알지요.
화가 주어에서 목적어로 변하는 단계에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화가 난다’와 ‘화를 낸다’는 것이 같은 것이 아니라 두 단계로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화를 보는 시각이 바뀔 거예요.
이때 ‘~구나’ 기법이 작동하지요. ‘화가 났구나.’ 내가 화가 아니라 ‘화가 난 것’을 내가 보는 것이지요. 내가 아닌 ‘화’라는 나와 다른 주어가 올라오는 것을 바라봅니다. 그렇게 ‘화’라는 감정과 자신을 동일시만 안 해도 화의 불꽃에 자신이 휩싸여 화상을 입지는 않지요.
‘화가 난다’와 ‘화를 낸다’는 것이 다르다는 것은 단순히 문법적 차이가 아닙니다. ‘화가 난다’에서 화는 1차 감정이고, ‘화를 낸다’에서 화는 2차 행위이지요. ‘화’라는 단어를 똑같이 쓰고 있지만, 완전히 다른 속성을 가진 동음이의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화가 나는 것과 화를 내는 것의 차이’
화가 나는 것은 화가 주어이고
화를 내는 것은 화가 목적어이지
화가 목적어라면 누군가 주어가 있어야지
그런데 그 주어가 굳이 내가 될 필요 있겠어
화가 나는 것은 지가 나는 것이고
화를 내는 것은 내가 내는 것이지
‘화가 난다’에서 화는 1차 감정이고
‘화를 낸다’에서 화는 2차 행위이지
화가 나는 것을 내가 어쩔 수 없지만
화를 내는 것은 내가 책임져야지
내가 어쩔 수 없는 화가 나는데
내가 마구마구 화를 낸다면
그 책임은 화가 지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 주체인 내가 져야 하니 말이야
화가 나지 않을 수는 없어도
화를 낼지 말지는 결국 내가 하는 것
화가 주어에서 목적어로
매번 넘어가지 않기만 해도 뭘 더 바랄까
( 이상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