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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현 Jul 11. 2021

#107 어른이가 되어

#107 어른이가 되어


산책길 접어드는 입구에 돌계단의 받침돌이 빠져나와 흔들거립니다. 한두 달 전 출근길에도 빠져 있어 손을 봤는데 이번 비로 또 빠져나왔네요. 받침돌을 낑낑거리며 들어 다시 자리 잡고 주위에 돌멩이를 주워와서 탄탄하게 받쳐 놓습니다. 어르신들이 많이 다니는 길이라 흔들거리는 받침돌이 위험했는데 손에 흙을 묻히고 삼십 분 헤매다 보니 그래도 다시 견고한 돌계단이 되었습니다.


자주 다니던 길, 오늘은 어떻게 새롭게 가볼까 생각하다 신발과 양말을 벗었습니다. 갑자기 맨발 산책을 하고 싶어졌지요.


언제부터인가 산책길에 맨발로 다니시는 분이 하나둘 눈에 띕니다. 동네 뒷동산이 흙길이니 걷기에도 괜찮아서이겠지요. 그 모습들을 보며 저도 언제 한번 신을 벗고 맨발로 걸어 봐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였습니다.


이제 저에게 손에 흙 묻혔다고 지지라고 말리거나 맨발로 흙길을 밟는다고 뭐라고 혼낼 어른도 안 계십니다. 저는 다섯 살 어린이가 아니고 이제 오십 대 후반 어른이 되어 버렸으니까요. 저를 혼낼 어른이 없으니 마느님(?)에게만 비밀이 지켜진다면 맨발 산책을 즐길 수 있겠군요.


때마침 소낙비가 내립니다. 맨발에 비를 맞고 걸으니 자연인이 된 기분입니다. 맨발 산책 초보자로서 행여 다칠까 봐 발끝만 보고 걸어가니 마주치는 다른 이들의 눈길도 별로 신경 쓰이지 않더군요.


언젠가 맨발로 걸으며 산책길을 싸리비로 쓰시던 분을 출근길에 만났습니다. 그분 덕분인지 길이 돌멩이 별로 없이 걷기 좋은 흙길이 되어 있었지요. 어쩌면 오늘 아침에도 벌써 그분이 이 길을 싸리비로 쓰셨는지 모르지요. 세상에는 감사한 분들이 많습니다.


다른 것 생각할 틈 없이 한 걸음 한 걸음에만 집중해 걷게 됩니다. 맨발로 걸으니 저절로 걷기만 집중하는 걷기 명상이 되는군요. 생각보다 맨발로 걸을 만했습니다.


가볍게 비가 뿌려서 그런지 오늘은 유난히 맨발로 걷는 분들을 많이 만납니다. 남성이 세 분이었고 여성도 두 분이나 맨발로 산책을 하시더군요. 맨발 동지로서 왠지 인사라도 드려야 할 것 같이 반갑더군요.


정자에서 숨 돌리며 정자 마루에 찍힌 발자국을 봅니다. 제 발이 저렇게 생겼군요.  발님아 주인 잘(?) 만나 오늘도 고생 많다.


내려와 에어건으로 발에 묻은 흙을 털어내고 다시 등산화를 신으니 그 딱딱한 등산화 안에 발이 솜털에 쌓인 것 같습니다. 신발이 이렇게 푹신한 것이군요.


올라가며 손 본 돌계단 받침돌이 괜찮은지 힘을 주어 디뎌봅니다. 흔들림 없이 받침돌이 잘 버텨 주네요. 발뿐 아니라 손에도 흙 묻힌 보람이 있습니다.


비 맞으며 맨발로 다닌 하루, 몰래 흙장난 거사(?)를 치른 어린이가 된 기분입니다. 돌아와 마느님에게 이실직고를 했는데 예상외로 무사히(?) 넘어가네요. 아내도 산책길에 맨발로 산책하시는 분들을 자주 봐서인지 저를 그리 이상한 철부지 남편으로 보지는 않던데요.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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