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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현 Sep 12. 2021

#112 몸 수업

#112 몸 수업


갑자기 눈앞에 까만 실타래와 부유물이 떠다닙니다. 벌초를 마치고 운전하고 돌아오던 중이었지요. 처음에는 무슨 그림자가 이렇게 움직이지 하면서 차 안에서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눈을 주위로 둘러보니 부유물도 따라 이리저리 움직입니다. 물에 잉크 한 방울을 떨어뜨렸을 때 생기는 선 자취같이 눈앞에서 실뭉치들이 떠다닙니다. 한쪽 눈을 번갈아 가려 보니 왼쪽 눈은 깨끗한데 오른 눈은 무엇인가 떠다니며 뿌옇게 시야를 흐립니다.


‘아이코, 안구 내 출혈이 생겼나 보다.’ 망막 출혈일 듯싶습니다. 졸면서 듣던 학생 때 안과 수업에서 교수님이 안과 응급질환으로 강조했던 커튼이 내려오듯이 시야 결손이 생기는 망막박리 증세는 아닌 것 같아 다행이라 여겨집니다.


운전 중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고 주말이라 응급실을 가도 특별히 할 것이 없겠지요. 집에 돌아와 안과 친구에게 물어보니 역시 망막 출혈이 가장 의심된다는 답변입니다.


3년 연속 이맘때 무슨 일이 있네요. 재작년과 작년 여름은 발 골절로 깁스를 하고 지냈는데, 올해에는 눈이 문제를 일으키는군요. 하긴 반백 년 넘게 써온 몸이 이 정도 버텨주는 것에 감사할 일이지요. 자동차는 십 년 이상 넘으면 골골해지고, 핸드폰은 약정기간 이 년 지나면 빌빌한 데, 오십 년 넘게 큰 고장 없이 지탱해 주는 몸이 기특합니다.


몸은 빌린 것이지요. 여러 생명체의 성분들이 수십 년간 제 몸에 녹아있습니다. 제가 취한 식물, 동물과 제가 마신 공기, 물이 제 몸을 이룹니다. 그렇게 빌렸으니 감사히 잘 돌봐야지요. 살아있는 동안 빌려준 존재에게 감사한 마음으로 몸을 돌봐야지요.


몸을 처음으로 받으면서 돈을 지불하지 않았으니 구매한 것은 아니고 빌린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몸의 대여 기간은 무척 길군요. 수십 년간 장기 대여된 몸입니다. 월세로 빌린 것인지 전세로 빌린 것인지 무상으로 쓰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몸을 유지하는데 무엇인가를 해주어야 하니 무상은 아닌 것 같고, 매일매일 소소하게 들어가는 것이 있으니 전세보다는 월세 정도로 보아야 할까요. 수십 년 사용하면서도 대여 조건과 기간은 잘 모르겠지만, 언젠가 반납할 때가 오면 그래도 온전히 반납하며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 전하고 싶군요.


몸에 달린 팔다리, 눈, 코, 귀가 그냥 붙어있는 것 같은데, 그것 하나하나 제대로 작동하지 못할 때 우리는 걸을 수 없고,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지요. 눈에서 출혈이 되었으니 한쪽 눈이 깨끗이 잘 안 보일 뿐인데, 뇌에서 출혈이 있었다면 더 큰 후유증이 생길 테니 그나마 다행이라 여겨야겠지요.


눈은 뜨면 그냥 당연히 보이는 것이라 여겨졌는데 눈은 참 귀한 존재였습니다. 발은 당연히 나를 지탱하는 몸의 기관이라 여겼는데, 발을 다쳐 수술하고 깁스를 하고 보니 발의 소중함을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발골절로 발의 소중함을 몸이 가르쳐주었다면, 이제 눈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기 위한 수업이 시작됩니다.


몸은 평생 가르침을 주고 있군요. 몸은 선생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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