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재미있게 본 영화가 무엇인가요?
잠깐 생각할 시간을 드릴 동안 다른 분들은 어떻게 대답했는지 볼까요? 중앙일보(2014.3.29) '시시콜콜 100문 100답'에 이 질문을 서울시장 후보에게 했습니다. 후보자 네 명에게서 나온 대답은 흥미롭게도 '닥터 지바고'와 '벤허'가 2표씩 몰표가 나왔지요.
무척 오래된 영화 같은데 언제 개봉된 것인지 궁금해져 찾아보았습니다. '닥터 지바고'는 1965년, '벤허'는 1959년. 오십 년이 더 된 영화이군요. 이렇게 오래된 영화인데 이분들 가슴 속에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이 영화가 훌륭한 명화임이 틀림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너무 오래된 영화라는 느낌은 지울 수 없었습니다. 혹시 후보자들은 바빠서 최근 영화는 볼 여유가 없었던 것은 아닌지.
주철환 PD는 같은 신문에 이에 대해 칼럼을 썼습니다. '세상에 영화가 수없이 많은데 중복이라니. 게다가 '감명 깊게'가 아니라 '재밌게' 본 영화다. 이미지를 고려한 전략적 답변? 그런데 수긍이 간다. 겹치기로 응답한 후보들은 재미의 기억을 공유한 '우리 세대였다. '우리'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양해를 구한다. 중간고사, 기말고사가 끝나면 '우리'는 대한극장으로 단체관람을 갔다.' 그의 칼럼은 이렇게 끝을 맺었습니다. '팝송 가사를 한글로 적어 부르던 시절에 단순미래, 의지미래라는 말을 배웠는데 당시엔 헷갈렸다. 이제는 구별이 된다. 나이 먹는 건 단순미래, 마음먹는 건 의지미래. 오래 사는 건 단순미래, 젊게 사는 건 의지미래.'
그는 수긍이 간다고도 했지만 저는 고개가 자연스레 끄덕여지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작은 결심만 하게 되었지요. 누군가 나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면, 수십 년 전 본 영화 이름은 대지 말아야지. 아니 영화가 아니라 책이나 여행 경험을 묻는다 하더라도 마찬가지. 하루에도 수많은 새로운 책들이 쏟아지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수십 년 전 읽어 제목도 가물가물한 책 이름은 대지 말아야지. 세상은 넓다는데 '가장 인상 깊은 여행장소는?'이란 질문에도 지금은 이미 다 변해 버렸을지 모를 수십 년 전 다녀온 곳은 대지 말아야지. 수십 년 전 말고, 가급적 요새 본 영화, 요새 읽은 책, 요새 다녀온 여행지로도 풍부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인생의 시간을 늘려 보아야겠다는 욕심을 부려 봅니다.
조남준의 '술집 풍경'이란 그림에 이런 말이 적혀 있습니다.
'청년은 미래를 말하고
중년은 현재를 말하고
노인은 왕년을 말한다.'
언젠가는 나이가 들어 왕년을 이야기할지 모르지요. 하지만 움직일 수 있고, 읽고 볼 수 있을 때에도 왕년의 호칭으로 불리길 원하고, 왕년에 다녀온 여행의 추억에서만 살고, 왕년에 읽은 책과 왕년에 본 영화로만 이야기한다면 그는 그 왕년의 시점에서 멈추어 과거의 삶을 사는 것이지요. 나이 먹는 건 의지와 상관없는 시간의 차원입니다. 하지만 그 시간을 무엇으로 채우느냐는 것은 의지의 차원이지요. 단순미래를 살지, 의지미래를 살지도 각자 스스로 결정할 일이지요. 술집에서 미래를 말할지, 현재를 말할지, 왕년을 말할지도 각자 스스로 결정할 일인 것처럼.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의 흐름을 각자의 방식으로 채워가지요.
재미있는 영화 이야기하다 너무 무겁게 이야기가 흘렀네요. 그런데 참, 대답할 준비가 되었나요? 가장 재미있게 본 영화가 무엇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