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드라인? 스타트라인!

by 이상현

할 일들이 많아 가슴을 짓누르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며칠 동안 손대지도 않고 있으면서 계속 제 가슴을 짓누르고 있는 숙제 거리들 말입니다. 어떤 과제가 새로 생긴다는 것은 그동안 평온했던 우리 마음의 평형 상태가 깨지며 불균형을 이루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이러한 상태는 그 과제가 해결될 때까지 다른 일을 하면서도 머릿 속 어느 구석에 남아 계속 뇌를 혹사시키게 됩니다.


자이가르닉 효과는 이를 잘 설명해 줍니다. 러시아의 심리학과 학생이던 블루마 자이가르닉과 그녀의 스승인 쿠르트 레빈이 1927년에 발표한 것인데, ‘끝마치지 못하거나 완성되지 못한 일은 잘 잊혀지지 않고 마음속에 계속 떠오른다.’라는 내용이지요.


끝내지 않으면 계속 마음속에 남아 우리를 괴롭히는 여러 상황을 이겨내는 방법은 없을까? 플로리다 주립대학의 로이 바우마이스터의 연구에서 그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즉 한 그룹에는 과제만 부여하고, 다른 그룹에는 과제와 함께 그 과제를 언제까지 어떤 방법으로 해결할 것인지 계획서도 작성하도록 했습니다. 두 그룹 모두 과제에 대한 압박감을 받을 것이라 생각되지만, 구체적 일정 계획서를 제출한 그룹은 과제만 부여된 그룹보다 스트레스로부터 벗어나 있었다는 것이지요.


어떤 과제가 생겼을 때 우리의 무의식은 의식에게 '계획을 세우라'고 끊임없이 몰아세웁니다. 이러한 무의식의 요구는 적절한 긴장감을 주며 과업을 해결하는 에너지가 될 수도 있지만, 대부분 뇌 깊은 생각 회로 속에서 엄청난 스트레스를 유발하게 되지요. 무의식의 요구를 잠재우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계획을 세우면 되지요. 계획을 세우는 순간부터 무의식은 그 문제를 가지고 더이상 의식에게 달달 볶지 않습니다.


홍승권 교수님은 여러 잡다한 생각이 떠오를 때 집중하는 방법을 '일정잡고 생각 보류하기'라는 재미있는 표현으로 정리해 주셨습니다. 즉 현재 하고 싶어하던 일을 방해하는 다른 생각이 떠오를 때 그것을 일정으로 잡고 보류한다는 것이지요. 저 자신도 책을 읽다 잡념이 생기면 포스트잇이나 종잇조각에 일단 그것을 적어 놓고, 그 생각을 저의 뇌에서 종이로 옮겨 놓곤 합니다. 이렇게 생각을 뇌에서 종이로 옮겨 놓아 비워두면, 그 비워둔 공간을 현재에 집중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조직에서 문제가 발생했을 때도 마찬가지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겠지요. 잘 풀리지 않는 문제를 접할 때 저희 센터에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저는 이런 이야기를 하곤 합니다. "그 문제는 다음 주 화요일까지는 생각하지 맙시다. 이번 주말 동안 그 문제는 머릿속에서 지워버리시고, 그때 다시 생각합시다."


현재 어떤 일을 하다가 갑자기 떠오르는 다른 생각들, 오늘 어떤 과제를 해나가다가 갑자기 걸려온 전화나 메일들. 이런 것들로 우리의 뇌는 엉키게 되지요. 그래서 할 일 목록(to do list)을 이야기합니다. 할 일 목록은 스마트폰을 사용하든 메모지에 그냥 끄적이든 상황에 따라 사용할 수 있지요. 문제는 할 일 목록을 적는 방식인 것 같습니다. 지금 당장 하지 않을 것들은 일단 급한 대로 항목만 적어 놓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할 일 목록들이 쌓이면 그 자체가 그대로 스트레스가 되지요.


몇 분 내 해결할 수 없는 일들, 즉 몇 시간이 필요한 일은 시간 꼬리표를 달아 놓아야 합니다. (사실 몇 분 내 해결할 일들은 그냥 항목만 기록해 놓았다가 자투리 시간이 생겼을 때 하나하나 지워가며 스트레스 푸는 용도로 사용하시면 되지요. 할 일 목록 하나하나 지우는 재미가 쏠쏠하지요. 문제는 항상 조금 시간을 들여야 할 조금 무거운 과제들입니다.) 시간 꼬리표가 달리지 않은 할일 목록은 머릿속을 빙빙 돌며 시도 때도 없이 우리 뇌에 과부하를 주지요.


시간꼬리표 하면 일을 마무리하는 시간인 데드라인을 생각하는데, 더 중요한 것은 일을 시작하는 스타트라인입니다. 그런데 스타트라인의 의미를 스스로 재설정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스타트라인은 그때부터 그 일을 해야지라는 의지의 표시라기보다, 그때까지 그 일을 잊어야지라는 의지(!)의 표시라 생각하면 어떨까요. '그때까지 그 일은 내 머리 속에 없어'라는 다짐입니다. 그리고 그 일에서 자유로워지십시오. 그때까지...


'데드라인은 그때까지 그 일에 집중하기 위해서

스타트라인은 그때까지 그 일을 잊기 위해서'


이렇게 정리한다면 어떨까요?

이제 머릿속을 비워 주세요. 스타트라인을 적어 놓고 최소한 그때까지는 그 생각을 잊어 주세요.


(보탬말)

그 스타트라인이 시간이 되었는데, 그 일을 하고 싶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할까요?

그럴 때는 가차 없이 스타트라인을 다시 쓰세요. 스타트라인이 지났는데, 빨갛게 기한이 지난 할 일 목록을 보고 있는 스트레스보다는, 능동적(!)으로 스타트라인을 스스로 재설정하는 것이 나을 거예요.

보류 인생, 게으른 듯 싶지만 더 중요한 것은 시작하지도 않은 일들에 머릿속 내어주는 것보다 현재에 집중하는 것이겠지요.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세로와 가로 세상